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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Mar 28. 2024

각기 다른 빛을 숨긴 원석 같아서

귀를 기울이면 | 지브리 스튜디오

중학생 때쯤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했던 영화가 있었다. 풋풋한 사랑이야기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컨트리로드'라는 노래가 자꾸 입 안에 맴돌아서 한동안 불렀었다. 그것이 내가 본 첫 번째 지브리 영화였다.



'스튜디오 지브리'(이하 지브리)의 이름은 사하라 사막에 부는 뜨거운 바람을 뜻하는 리비아어  'ghibli'에서 왔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정찰기의 이름이기도 했다. 비행기 마니아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자며 사용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지브리'라 불렀으나 원어 발음은 '기블리'라고 한다.)

지브리에서 제작한 작품은 많이 흥행했고 특유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팬들도 폭넓게 있다.(일본 박스오피스를 기준으로 흥행 1위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위 <하울의 움직이는 성>, 3위 <모노노케 히메>다.) 넷플릭스에서 2조 원을 투입해 지브리 애니메이션 21편의 판권을 살만큼 전 세계에서도 그 특유의 분위기와 아름다움이 널리 사랑받고 있다. 이들의 흥행작은 말 안 해도 다 알만큼 유명하니까 넘어가고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귀를 기울이면>이다.



1995년에 제작된 <귀를 기울이면>은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속에서 등장하는 환상적인 장면은 주인공이 만들어가는 이야기 속 장면뿐이다.

1989년 월간 소녀 만화잡지 리본에 연재되었던 '히이라기 아오이'의 동명 만화가 원작인데 사춘기 소년 소녀의 풋풋한 첫사랑이야기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면서 주인공들이 중학교 1학년에서 중3으로 바뀌고 진로와 꿈,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나쁜 캐릭터가 없어서 편안하고 잔잔하게 즐길 수 있다.




주인공 시즈쿠는 책 읽기를 좋아해서 아버지가 근무하시는 도서관에서 항상 책을 빌려본다. 자신이 읽으려는 책마다 '아마사와 세이지'라는 사람이 먼저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하는데 학교 선생님을 통해 같은 학교 동급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교 발표회 때 사용할 컨트리로드 번안 가사를 쓰다가 재미로 쓴 '콘크리트 로드'가사를 책 속에 끼워둔 채 책을 잊고 두고 간다. 뒤늦게 찾으러 왔더니 한 남학생이 책을 보다가 '콘크리트로드'는 그만 두라며 놀린다.


이후 아버지 도시락을 가져가던 중 전철에서 만난 이상한 고양이를 따라 신기한 골동품 가게 지구옥에 들어간다. 신비한 고양이인형 바론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는 골동품 가게주인 '니시 시로'는 세이지의 할아버지. 시즈쿠의 개사를 놀리던 세이지는 가게 지하에서 바이올린을 만들며 지낸다. 시즈쿠는 감탄하며 세이지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부탁해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때마침 돌아온 할아버지와 친구들이 함께 연주해 주는 장면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


자신을 놀린 남자아이가 기대하던 '아마사와 세이지'라는 실망도 잠시, 차츰 호감을 쌓아가고, 세이지는 시즈쿠가 알기 전부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을 알리려고 시즈쿠보다 먼저 책을 엄청 많이 읽었다는 것. 그러나 세이지는 바이올린 제작 장인의 꿈을 가지고 유학을 가고, 벌써 진로를 결정한 모습에 자극받은 시즈쿠도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글쓰기에 전념한다.

학교 성적이 떨어져서 문제를 겪지만 자신을 믿어주는 아빠 덕분에 두달만에 소설을 완성한다. 바론을 소설 주인공으로 허락해 준 니시 시로 할아버지에게 가장 먼저 보여드리지만 재미있게 잘 읽었다는 칭찬에도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는 시즈쿠는 울음을 터트린다. 시즈쿠의 첫 소설이 마치 세이지의 첫 바이올린 같다며 조금씩 다듬어가면 된다고 위로해 주시는 할아버지 덕에 진정하고 잠시 미뤄둔 학업에 열중한다.

어느 이른 아침 우연히 창밖을 본 시즈쿠는 오랜만에 돌아온 세이지를 만나고 함께 언덕을 올라 일출을 보며 청혼을 받고 끝이 난다.



소녀만화는 자신 없었던 미야자키는 함께 오래 작화감독으로 일해온 콘도 요시후미에게 감독직을 맡기는데 과장되고 역동적인 판타지 표현에 적합한 미야자키와 달리 특수효과 없이 일상을 현실적이고 섬세하게 잘 담아냈다.


공방에서의 컨트리로드 연주 장면을 중요하게 생각해 로토스코핑기법이 사용되었는데 프로의 연주를 비디오에 담고 그 영상을 보면서 작화했다. 바이올린, 비올라, 류트, 코넷, 피리, 탬버린 6개의 악기를 3분 2초 분량에 담는데 TV 한 회 차 분량의 3천 장의 그림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음악도 당시 최신 기술이(라 잘 사용하지 않았)었던 돌비 디지털 포맷을 채용해 훌륭한 악기 소리를 즐길 수 있다.


전작인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과 <귀를 기울이면>은 도쿄 타마시의 세이세키 사쿠라가오카 역과 타마 뉴타운 주변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6년간 이 부근의 애니메이션 제작사 '즈이요영상'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동네의 곳곳을 시시콜콜하게 담아낸 덕분에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작품과 실제모습을 비교하러 많이 방문한다고 한다. 꿈을 꾸고 성취해가던 이야기 속 소년, 소녀가 그저 한낱 이야기가 아니라 이 장소처럼 어딘가에 실존할  같단 생각이 든다.

실제 방문비교 영상



개인정보보호 문제로 요즘은 볼 수 없는 도서대출카드가 추억에 잠기게 하는데 실제 이 작품이 상영된 이후 일본 도서관의 청소년 이용자들이 배로 늘기도 했다니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다. 극 중에서 시즈쿠가 쓴 소설 '귀를 기울이면'은 후에 영화 <고양이의 보은>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21세기를 앞둔 일본은 버블 붕괴, 오움진리교, 고베대지진 등의 사건사고로 사회적 동요가 끊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인간불신과 허무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젊은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강한 작품이었다.

영화 전반을 흐르는 노래 '컨트리로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하는데 미야자키는 도시가 고향인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고향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가를 고민했다. 젊은 세대는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나온 고향이 콘크리트 로드라는 풍자를 통해 산업화 발전에 대한 비판도 전한다.



소박한 청소년의 사랑이야기가 반짝이는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은 평범하지 않은 주인공들 때문이다. 중학생의 나이에 이미 진로를 정하고 스스로를 다잡아가는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보기 힘든 캐릭터다. 그리고 공부는 잠시 내려놓고 글을 쓰겠다는 딸아이에게 그래보라며 믿어주는 아빠도 흔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캐릭터들이 평범한 옷을 입고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우리 삶에 필요한 반짝이는 열정과 순수함을 깨닫게 된다.


상상 속에서 고양이 인형 바론과 함께 하늘을 날던 시즈쿠는 하늘의 커다란 유성을 보며 무서워하는데 이때 바론이 "가까이 있는 것은 작게, 멀리 있는 것은 크게 보이는 법"이라고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너무 커서 오늘의 일들을 작고 사소하게 여기는 모습을 말하는 것 같다.


남들과 다른 방식의 삶이란 그만큼 어려운 거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없으니까 말이지.


허둥댈 건 없단다.
시간을 두고 열심히 연마하면 된다.



콘도 요시후미는 <귀를 기울이면> 개봉 이후 인터뷰에서 차기작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귀를 기울이면> 이후 느끼는 것은 지금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우리 때와는 많이 달라서 굉장히 힘들지 않을까. 아이가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어렵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겁니다.
지금은 아이들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 잣대에 아이를 적용시켜 아이의 가치가 결정되죠. 때문에 측정할 수 없는 아이는 설 자리가 없어지고, 살아갈 희망이 없어지는 것 같은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있고, 못하는 아이도 있죠. 스포츠가 특기인 우리 아이의 친구를 보고 있으면, 모두가 놓인 상황 속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격려해 줄 수 있는 그런 것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그만두고, 모든 아이들에게 "너는 훌륭해"라고 말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아쉽게 1998년 대동맥 박리로 사망했는데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과도하게 일한 까닭이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기를 기대하지 말고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천천히 오래 다듬어가라는 대사를 이 시대의 10대들과, 또한 아직 방황하는 젊음들에게도 전하고 싶다. 모두에게 같은 길을 요구하는 분위기의 시대라 작은 응원이 얼마나 힘이 될까 미안한 마음이지만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 괜찮다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토닥여주고 싶다. 꿈을 꾸므로 반짝이는 시기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덮어버리지 않기를.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너의 길을 갈 수 있을 거라고 응원하고 싶다.


컨트리로드 듣기

カントリ― · ロ―ド

컨트리 로드

この道みち ずっと ゆけば

이 길을 쭉 가면

あの街まちに つづいてる 気きがする 

저 마을에 이어져있는 기분이 들어

カントリ― · ロ―ド

컨트리 로드


ひとりぼっち おそれずに

외톨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生いきようと 夢ゆめ見みてた

살아가자고 꿈을 꿨었지

さみしさ 押おし込こめて

쓸쓸함은 집어넣고

強つよい自分じぶんを 守まもっていこ

강한 자신을 지켜 나가자


カントリ― · ロ―ド

컨트리 로드

この道みち ずっと ゆけば

이 길을 쭉 가면

あの街まちに つづいてる 気きがする 

저 마을에 이어져있는 기분이 들어

カントリ― · ロ―ド

컨트리 로드


歩あるき疲つかれ たたずむと

걷다 지쳐서 멈춰 서면

浮うかんで来くる 故郷ふるさとの街まち

떠오르는 고향 마을

丘おかをまく 坂さかの道みち

언덕을 휘감은 비탈길

そんな僕ぼくを �しかっている

그런 나를 꾸짖고 있어


カントリ― · ロ―ド

컨트리 로드

この道みち ずっと ゆけば

이 길을 쭉 가면

あの街まちに つづいてる 気きがする 

저 마을에 이어져있는 기분이 들어

カントリ― · ロ―ド

컨트리 로드


どんな挫くじけそうな時ときだって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決けして涙なみだは見みせないで

절대 눈물은 보이지 마

心こころなしか 歩調ほちょうが速はやくなっていく

생각 때문인지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어

思おもい出で 消けすため

추억을 지우기 위해


カントリ― · ロ―ド

컨트리 로드

この道みち 故郷ふるさとへつづいても

이 길이 고향으로 이어져 있어도

僕ぼくは 行いかないさ 行いけない

나는 가지 않아 갈 수 없어

カントリ― · ロ―ド

컨트리 로드


カントリ― · ロ―ド

컨트리 로드

明日あしたは いつもの僕ぼくさ

내일부턴 평소대로의 나야

帰かえりたい 帰かえれない

돌아가고 싶어 돌아갈 수 없어

さよなら カントリ― · ロ―ド

안녕 컨트리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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