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있을 무렵 온 도시에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뮤지컬이 있었다. 초록색 배경에 검은 모자를 내려쓴 초록색 얼굴을 한 여자가 매혹적인 미소를 띠고 있는 포스터였다. 서쪽 마녀이야기를 담은 《위키드(Wicked)》였다. 무척 인기가 많은 듯했는데 가난한 워홀러는 엄두도 못 내고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만 했던 터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위키드 뮤지컬 동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내용도, 무대도, 노래도 너무 아름다워서 한참을 빠져 있었다.
《위키드》는 2020년 기준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흥행한 뮤지컬 2위다. 1982년부터 집계한 것으로 1등은 1997년 초연한 라이온킹이다. 시카고(1975), 오페라의 유령(1988), 맘마미아(2001), 레미제라블(1987), 캣츠(1982)보다 훨씬 늦은 2003년 막을 올렸으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유명한 소설인 《오즈의 마법사》의 스핀오프 격이다. (스핀오프 spin-off : 기존 영화, 드라마, 게임 등에서 등장인물이나 설정을 가져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 도로시가 허리케인을 타고 오즈에 떨어지기 전의 이야기를 재해석했는데 서쪽마녀가 아니라 마법사 오즈를 악인이었다 말한다.
뮤지컬의 부제가 'The Untold Story of the Wizards of Oz'(당신이 몰랐던 오즈의 마녀들 이야기)로 혼란스러운 오즈의 격변 속에서 글린다와 엘파바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보기 드문 여성 투탑인 뮤지컬로 제작비 130억에 의상 제작비만 35억이 들었다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350벌의 의상과 80여 개의 가발이 사용되는데 모두 다른 섬세한 디자인과 화려한 장식으로 눈을 홀린다. 각각의 의상을 예술작품이라 할만한 수준이다. 엘파바의 드레스는 360겹의 서로 다른 소재 원단을 덧붙여 완성했다고 하고 주인공 글린다의 드레스는 장식으로 인해 무게만 20kg이라고 한다.
또한 위키드의 무대는 시계 내부장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공연동안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무대가 54번 바뀌고 조명도 549번 바뀐다고 하니 그 화려함과 스케일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곡 한 곡 모두 빠질 수 없는 뮤지컬 넘버들은 스티븐 슈왈츠가 작사, 작곡한 것으로 오스카상, 그래미상을 3번씩 수상하고 토니상을 6번 수상한 쟁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사운드트랙과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사운드트랙에도 참여한 바 있다. 수많은 작품 중 그의 대표작이 위키드라고 하니 얼마나 귀에 감길지 생각해 보시라. 뮤지컬 곡들은 스토리 전개에 따른 극 중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기에 곡이 따라 부르기 쉽지 않고 노래로 기억되기보다 한 장면으로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특정곡 한두 곡정도만 기억에 남는다. (뮤지컬 수록곡들이 넘버로 호칭되는 까닭도 그런 거 아닌가? 딱히 제목을 붙이기보다 장면에 들어가는 소품처럼 번호로 지칭되는 거 말이다.) 그런데 이 위키드의 곡들은 다들 유쾌하면서도 쉬워서 금방 흥얼거릴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대사, 가사들을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하면서 말맛을 살린다. 엘파바와 글린다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쓰는 "I hope you're happy."는 퍽이나 좋겠다며 상대를 비꼬고 비난하는 말로 쓰이는데 실제로 두 친구가 신념 문제로 헤어지는 상황에서는 자신과 반대의 선택을 한 친구가 후회하지 않고 행복하기를 빌어주는 말로 쓰이는 것이다.
뮤지컬은 서쪽 마녀의 죽음으로 시작하는데 기뻐하는 오즈인들과 달리 슬픈 얼굴을 한 글린다가 있다. 글린다가 서쪽 마녀의 친구였다는 소문이 사실인지를 물으며 이야기가 과거로 돌아가 두 마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귀한 집 아가씨이며 사교계 스타인 글린다(옛 이름은 갤린다)와 동생 네사를 돌보려 따라온 녹색 소녀 엘파바는 서로 극과 극인 모습이지만 우연히 룸메이트가 된다.
글린다가 자신을 따라다니던 남학생 보크를 네사에게 넘긴 일을 고마워하면서 엘파바만 듣던 마법 교습을 (엘파바가 마담모리블에게 간청하여) 같이 듣게 되고 점점 가까워진다.
한편 오즈에는 말하는 동물들에 대한 억압이 심해지며 시즈의 유일한 동물 교수인 딜라몬드 박사도 잡혀간다. (이때 엘파바와 피예로가 구한 말하는 새끼사자는 미래의 겁쟁이 사자가 된다.) 갤린다는 자신의 이름을 잘 발음하지 못한 딜라몬드 박사를 기리며 이름을 글린다로 바꾼다 선언하고 엘파바와 함께 에메랄드시를 즐겁게 구경한다. 마법사를 만난 엘파바는 동물들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엘파바의 능력을 이용하고 싶은 마법사는 엘파바를 속여 마법서를 읽게 해서 방에 있던 모든 원숭이에게 날개가 돋게 만들고 첩보활동에 쓰려한다. 마법사는 글린다와 엘파바에게 권력을 약속하지만 엘파바는 마법사가 동물들을 억압하는 걸 알고 마법서를 들고 도망친다. 마담 모리블은 이제 마법사의 편에 서서 엘파바를 사악한 마녀로 몰아간다. 엘파바가 빗자루를 타고 마법사의 성을 탈출하는 것까지가 1막이다. 이 장면에서 부르는 'Defying Gravity(중력을 벗어나)'는 마법으로 날아오르는 장면인 동시에 절대권력의 위협이나 주변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을 모두 의미한다. (부끄럽지만 직접 부른 Defying Gravity 커버)
2막에서는 서쪽마녀가 된 엘파바와 동쪽마녀 네사, 시민들에게 서쪽마녀의 사악함을 말하는 마법사와 마담모리블 옆에서 착한 마녀로서 시민들을 안심시키는 글린다가 있다. 심장이 줄어들어 죽어가는 보크를 살리기 위해 양철인간으로 만들고 엘파바를 구하고 경비대에 잡힌 피예로를 살리기 위해 주문을 외워 허수아비로 만드는 장면들이 나온다. 좋은 일을 하려다가 동생과 스승, 연인을 죽였다며 엘파바가 절규하며 다시는 좋은 일은 하지 않겠다는 장면은 압권.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엘파바와 글린다가 For Good을 부르며 상대를 통해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인상적이다. 감정적인 이상주의자였던 엘파바는 현실주의자가 되어 진실을 덮으려 하고 냉철한 실리주의자였던 글린다는 자신이 파멸하더라도 친구의 진실을 알리려 하니 말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으니 결말은 직접 확인하시길.
Because I knew you, I have been changed, for good.
행복하게도 이 위키드가 이번에 뮤지컬영화로 돌아와서 11월 20일에 개봉한다. 북미 개봉일이 11월 22일로 한국이 전 세계 최초로 개봉하는 것이다. 매우 특별한 경험인 걸 알면서도 한번 관람에 10만 원이 훌쩍 넘는 뮤지컬을 자주 관람하는 것은 조금 부담스러운데 만 원대 영화라니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한국어더빙에는 한국뮤지컬주역배우들이 직접 더빙에 참여해서 그들의 넘버도 즐길 수 있다니 뮤지컬 팬들은 자막과 더빙 N회차 관람을 기대하고 있다. 많은 뮤지컬들이 영화화되면서 뮤지컬의 장벽이 낮아지고 있는 걸 기쁘게 반기며 위키드 관람을 손꼽아 기다려야겠다. (앗. 영화가 위키드의 내용을 1, 2편으로 나눠서 만든다는데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를 스포한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