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봐도, 남이 봐도, 누가 봐도 나이를 먹었다고 인정할 만한 나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나이에 걸맞은 나잇값을 하고 싶은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나잇값을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꼰대짓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생각과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이 큰 차이가 있다 보니 발생한 것이리라.
하기사 나이를 먹었다고 다 나잇값을 하고 살까?
흔한 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는가.
주변을 둘러봐도 나이를 먹었다고 그 숫자에 걸맞은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더라.
정작 자신은 나이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는 나이에 맞는 대접을 해주길 바란다.
말다툼을 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특징이 있다.
기선 제압용으로 제일 먼저 꺼내든 무기가 바로 나이이다.
일단 목소리의 데시벨을 최대치로 높이면서 대뜸 “너 몇 살이야?”로 포문을 연다.
상대방은 “그래, 나 몇 살이다. 그런 너는 몇 살이냐?”로 응수한다.
속된 말로 민증을 까는 것이다.
본인보다 나이가 많을 경우에는 살짝 당황하면서 “나이 쳐 먹었으면 나잇값을 해라.”라고 대거리한다.
그런데 본인보다 나이가 어리면 의기양양해서 “나이도 어린것이 어디다 대고 꼬박꼬박 말대꾸야.” 하며 연장자라는 무기를 휘두른다.
나이가 벼슬인가?
아니, 나이가 별 건가?
시간이 흐르고 해가 바뀌면 좋든 싫든 떡국 한 그릇 먹듯이 한 살 더 먹게 되는 것이 나이인데 나이가 무슨 벼슬이라고 말끝마다 나이를 들먹인 단말인가.
까짓 거 좋게 생각해서 나이가 삶의 연륜이고, 벼슬이라 치자.
그래서 나이 먹었으니 나잇값을 하고 싶다.
하지만 실상은 나잇값 한다는 소리보다는 꼰대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되니 참 서글픈 일이다.
물론 나도 안다. 외모로나 나이로나 누가 봐도 꼰대라고 불릴법하다는 걸.
그래도 곧 죽어도 꼰대라는 소리는 듣기 싫어 열심히 꼰대 짓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노력이 나를 꼰대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와닿지는 않을 것 같다.
그들은 이미 나의 외모 견적을 보고 꼰대라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내 입에서 아무리 좋은 말이 나오더라도 이미 꼰대가 하는 말로 치부해 버릴 것이다.
그런데 엄격히 말하면 젊음은 뭘 중뿔나게 잘해서 하늘에서 "옜다. 젊음을 주마." 하고 내려 주는 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늙음은 살면서 크게 잘못했다고 받는 벌도 아니다.
그저 시간의 흐름이 젊음과 늙음을 갈라놓았을 뿐이다.
고로 지금은 비록 늙어서 주름이 짜글짜글하지만 한 때는 다리미로 밀어 놓은 듯 판판하고, 깐 달걀처럼 매끈한 리즈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뭘 말하려고 해도 혀끝에서 뱅뱅 돌기만 하고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답답하다.
하지만 한 때는 두뇌 회전이 컴퓨터 CPU처럼 팡팡 돌아가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나의 리즈시절의 과거를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결코 알리가 없다.
단지 이미 늙어 버린 지금의 모습만으로 판단을 하고, 늙은 꼰대라 규정을 짓는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대다수의 꼰대들은 나이와 경험을 들먹이며 자신이 짜놓은 틀 안에서 젊은이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꼰대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핵심이 내가 경험한 것을 근거로 내 생각이 옳고 너는 틀리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라는 말이 있다.
아주 일부분만 보고 전체를 다 아는 것처럼 큰소리치는 경우를 말하는데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큰 코끼리를 만진다면 일부분만 만져보고 코끼리라는 동물에 대해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코끼리의 다리를, 누군가는 코끼리의 코를, 누군가는 코끼리의 상아를 만지면서 각기 다른 경험이 형성된다.
전체를 본 적이 없으니 자기의 경험이 전부이고 자기가 만진 부분이 코끼리라고 굳게 믿는다.
다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둥근기둥 같다고 할 것이고, 상아를 만진 사람은 매끈하고 딱딱한 뿔 모양이라고 할 것이고, 귀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넓고 얇은 보자기 같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각기 달리 얘기하는 상대방의 주장에 쉽게 수긍을 할까?
절대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내가 직접 만져보는 경험을 해 봤기 때문에 내가 만진 코끼리의 일부분을 코끼리라고 철석같이 믿을 뿐이다.
이 상황에서는 보지는 못하고 만져보기만 한 경험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만져봤기 때문에 확신에 차있어서 큰소리치며 상대방이 틀렸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만져보지 않았더라면 상대방의 얘기에 수긍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져보는 경험을 해 봤기 때문에 내가 옳고 당신이 틀렸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만진 것이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잘못된 믿음이나 신념은 이토록 위험하다.
결국 내 경험이 만들어 낸 편향된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면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경험이 만들어 낸 결과가 ‘다르다’가 아니라 ‘틀리다’가 되니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은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다.
다름이 인정이 안 되니 내 경험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경험은 틀리다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경험의 한계와 차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경험이 많은 꼰대와 꼰대들이 잘 모르는 요즘의 새로운 경험으로 무장한 요즘 것들 간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내 경험으로만 보면 틀릴 수 있지만 상대방의 기준으로 보면 맞을 수도 있다. 다만 너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생각이 다른 것뿐이다.
꼰대들이 경험하지 못한 요즘 세대들의 새로운 문화나 경험을 틀리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생각하고, 요즘 세대들은 기성세대를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고지식한 옛날 생각이라고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성세대들에겐 오래된 경험 속에서 나오는 노하우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응축된 통찰력도 있다.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듯이 그들의 지혜와 통찰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생각만으로 되는 것은 없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경험만 옳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나 ‘꼰대’다.
따지고 보면 꼰대는 나이나 세대적인 특징과는 관련이 없다.
자신이 경험한 것 이외에 다 부정을 하면 누구나 꼰대가 되는 거다.
어제의 젊은것들이 오늘은 꼰대가 될 수도 있다
할 말은 하되 서로의 경험과 의견을 들어주고 인정하는 것,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수용하려는 마음을 가진다면 갈등은 줄어들지 않을까?
거기에 한 가지 더 곁들이자면 입장 바꿔 생각해 보는 이른바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갈등이 생길 리 없다.
하지만 역지사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역지행지(易地行之)이다.
백날, 천날 생각만 한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생각을 했으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넘어서 역지행지(易地行之)를 한다면 나잇값을 한다는 소리에 더해 드물게는 "존경스럽다.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