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전진하는 세탁기

수건 6장조차 마음 편히 돌리지 못하게 된 까닭

by 지인


#2.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자동차, 기차와 같은 동력 장치부터 커리어, 잠재력 등 비물질적인 가치까지 수많은 것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만, 그중 세탁기가 있을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 세탁기야말로 가장 눈에 띄게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였다. 특히 우리 집에서는.


흰색의 드럼세탁기는 겉으로 보기에 연식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쓸만해 보였다. 이사 전, 집을 보러 왔을 때 세탁기를 따로 사용하고 있는 걸 봤지만 그저 식구가 많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우린 신혼이니까, 두 사람 빨랫감이니까 이 소형 세탁기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아이는 맨투맨 하나도, 수건 6장도 버티기 힘들어했다.


세탁까지는 그나마 좀 하는 편인데, 탈수 단계에 들어서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정지 버튼을 누르거나, 달려와 몸으로 막지 않는다면, 아마 세탁기는 그 거대하고 육중한 몸을 전부 노출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나와버리면 해결이 쉽지 않은 세탁실 구조상 어떻게든 중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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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일반적인 세탁기 모습 / (우) 탈수가 진행될 때 세탁기 모습


육중하게 흔들리는 세탁기를 몸으로 방어하는데 지친 우리는 A/S만 4-5번을 받았다.

그때마다 세탁기가 받았던 진단명은 이러했다.


① 바닥이 타일이라 미끄러워서

A/S 수리 기사를 통해 들었던 첫 번째 원인은 세탁기가 놓인 바닥이 미끄러워서 세탁물이 돌아갈 때마다 세탁기가 움직인다는 것. 미끄러운 타일을 바꿀 수도 없다 보니, 우선 세탁기 바닥에 고무 패킹을 붙이는 것으로 1차 대처를 했다. (그래도 이 대처로 약 한 달간은 세탁기가 탈출을 멈췄다)


② 빨랫감을 많이 넣어서

세탁기의 적정 빨랫감 양은 세탁조의 절반보다 적게라고 한다. 그 이상 넣으면 많은 빨랫감 때문에 세탁조가 돌아갈 때마다 흔들림이나 반동이 심할 수 있다고. 맨투맨, 수건과 같이 물을 흠뻑 흡수하는 소재들은 특히나 조심해야 하는 품목들. 빨랫감 무게도 물을 머금은 상태를 기준으로 해야 하므로 8.5kg 용량의 세탁기가 허용할 수 있는 빨랫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빨래를 여러 번 나눠서 해야만 했고, 특히 주말에는 세탁기가 쉴 틈이 없었다. (수건은 최대 6개 정도만 돌릴 수 있는 수준)

③ 세탁기 옆으로 약간의 틈이 있어서

세탁기가 돌아갈 때마다 몸체가 좌우로 흔들리는데, 옆에 있는 공간 때문에 고정되지 않고 자꾸 앞으로 빠져나온다고 한다. 아니, CF에선 드넓은 거실에 세탁기를 두던데 왜 그들은 괜찮고 우리는 괜찮지 않은 것일까? CF 같은 집을 꿈 꿀순 없으니, 일단 두꺼운 종이부터 그 틈에 끼워 넣어야 했다. 최대한 세탁기가 움직일 만한 공간을 줄여야만 한다!


④ 세탁조 통이 비뚤어져서

세탁물을 돌리는 세탁조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다는 의견. 그런데 세탁기가 오래되어서 현재는 단종된 상태라 세탁조만 바꿀 수는 없고 세탁기를 바꿔야 한다고. 하지만 대략 4-5번의 AS 방문기사 분마다 세탁조에 대한 의견이 달라서(누군 괜찮다고 하고, 누군 기울어졌다고 하고), 차마 집주인에게 세탁기를 바꿔달라는 이야기를 꺼내긴 어려웠다. 세탁기 수리와 세탁기 교체는 꽤 다른 문제니까.

이렇게 무수한 원인은 있었지만, 치료하기 어려운 불치병처럼 세탁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고무 패킹도, 좌우 공간을 막는 것도, 세탁물을 적게 넣는 것도 모두 일시적인 방법일 뿐이었다.

전진하는 세탁기와 산지도 벌써 일 년 하고도 반년,

내 작은 소망은 수건을 마음 편히 돌리는 일이다. 수건 6개를 넣고도 맘 졸이며 세탁기를 바라보지 않고, 요란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리는 일 없고, 그 소리를 듣고 달려가 세탁기를 몸으로 밀어야만 하는 그런 일이 없기를.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말, 이런 데서 깨닫는 게 아닐까?

오늘도 난 백화점, 마트, 가전판매점에서 새로운 세탁기를 지날 때마다 설렌다.

(아직은 새 세탁기보단 코인 세탁소에 가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아 보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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