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그는 주저없이 힘있게 날 당겼다. 천근만근 같던 몸이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고무줄의 탄성처럼 가볍게 일으켜 세워졌다. 나와 같이 널브러졌던 자전거도 그의 손에 훌쩍 일어났다.
나는 단정하는 그의 어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되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다소 날카롭게 떨어진 어조에도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 가방이 토해낸 것들을 하나씩 주워담다가 이것 보라는 듯 웃었다.
“점심 도시락이 또 없네요. 오늘은 누굴 만났어요?”
“알 거 없잖아.”
“방금 오는 길에 보니 파란 모자 쓴 아이 하나가 아빠한테 뛰어가던데. 품에 엄청 좋은 거라도 있는지 웃고 있더라고요. 걔한테 줬어요?”
“…….”
나는 더 대꾸하지 않은 채 자전거 안장 위로 훌쩍 올라탔다. 그러자 강 주임도 어디서 생겼는지 자전거를 끌고 와 내 옆에 섰다. 쓰레기 처리장에서 주워 온 듯한 연식이 돋보이는 네발 자전거였다. 핑크색 몸체에 도배된 헬로키티 캐릭터가 그의 다리 사이에서 꼬질꼬질한 존재감을 발했다.
나는 그를 무시한 채 바로 출발했다. 강 주임이 낑낑대며 날 뒤따랐다. 19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거구의 남성이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네발 자전거를 굴리는 모습은 다소 징그럽고 웃겼다.
나는 간만에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오늘은 엄마의 기일이었다. 오늘만큼은 웃을 수 없었다. 내가 감히 엄마를 두고 혼자만 행복해선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언제든 불행할 자신이 있어야 했다. 어느 때든 불우한 삶을 살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
그 순간 꽁무니에 붙어 잘 오는가 싶던 강 주임이 날 앞질렀다. 끼이이익. 타이어 고무가 마찰하는 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급커브를 돈 강 주임은 아예 내 앞을 가로막듯 멈춰 섰다.
나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상체가 앞으로 크게 쏠렸다. 갑작스러운 기행에 해명을 요하는 얼굴로 그를 보자 강 주임은 도리어 답답하다는 듯 푸념했다.
“정말, 마흔자리 원주율은 외우면서 어떻게 쭉 뻗은 길 하나를 못 외워요?”
“쭉 뻗은 길 여러 개가 구불구불하게 얽혀 있잖아. 난 정돈된 것만 잘 외워.”
태연하게 받아 치는 내 대꾸에 강 주임은 답지 않게 찌푸린 얼굴이 되었다. 그는 검지로 앞과 뒤를 차례차례 가리켰다. 마치 내가 천천히 타일러야 말을 알아듣는 애라도 된 것처럼.
“우리는 저기서 출발했고, 저 앞에 도착지가 있으면. 그게 정돈된 거 아닌가요?”
“길은 그냥 나 있으면 길인 거야. 그걸 정돈하는 게 인간들 몫이고.”
“신 전임님은 꼭 자기 불리할 때만 인간인 척 하시더라.”
“완벽하진 않아도 난 완전한 인간이야.”
“인간들은 감정이 풍부하다던데. 그 점에서 신 전임님은 누구보다 로봇 같은 걸요.”
나는 내 앞길을 막은 그를 피해 바퀴를 조금 뒤로 굴렸다. 핸들을 틀 공간이 생기자 귀찮은 실랑이에서 얼른 빠져나갈 요량으로 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마음만큼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 탁, 탁, 탁. 있는 힘껏 발을 굴렀음에도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내 힘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니 강 주임의 억센 손아귀가 안장 지지대를 붙잡고 있었다. 내 발길질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헛수고로 돌아갔다. 내가 모난 눈초리로 그를 보자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씨구, 정말 잘나신 인간 다 되셨어.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그 똥고집, 저도 끝까지 인정해드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지각은 금물이니까요. 오늘은 봐 드릴게요. 그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에요, 신 전임님.”
그는 붙잡은 지지대를 당겨 나를 그와 같은 선상으로 끌어왔다. 그러곤 내가 왼쪽으로 기울여 놓은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려놓은 채 먼저 출발했다. 나는 뺨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 것 같은 기분에 약이 올라 홍조가 폈다.
강 주임은 그새 작은 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번 더 질세라 나도 서둘러 페달을 밟으며 그 뒤를 따랐다. 씨이, 오늘따라 먼지가 왜 이렇게 뿌얘, 앞이 하나도 안 보이게. 길을 잃는 것은 내 방향 감각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날씨 탓이었다. 쭉 뻗은 길도 미로처럼 보이게 하는 못난 세상 탓.
연구소에 도착했을 즈음 난 땀을 꽤나 방출하고 있는 상태였다. 강 주임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치대면서 온 출근길은 치열한 레이싱카 경주를 방불케 했다. 상당히 힘들었고 조금 재밌었다. 요 지경인 세상에서 터무니 없이 원초적인 쾌락을 느낀 것 같아 다소 부끄러워졌다. 나는 한참 숨을 고르고서야 출입증을 찍었다.
지나치는 유리창을 흘끔거리니 어렴풋한 내 실루엣이 비쳤다. 스치듯 보아도 내 꼴은 썩 멀쩡하진 않아 보였다. 땀은 커녕 호흡 한번 흐트러지지 않은 강 주임과 달리. 그는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한 대 때리기 딱 좋을 만큼 판판한 등짝이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떻게 저 작자가 ‘백의의 천사’, ‘연구소 아이돌’ 따위의 수식어를 얻어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싹싹하게 굴다가도 이렇게 얄궂은 장난만 치는…… 아. 거기까지 생각하다 나는 새삼 내 아침을 잠식했던 우울이 대강 씻겨 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여러모로 정신 사납게 만들어준 강 주임 덕분이라면 덕분이었다.
‘설마.’
일부러 그랬을까? 설마, 아닐거야. 어떻게 강 주임이 그래. 강 주임은…….
“해수야!”
반갑게 부르는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내 어깨 위에 팔이 얹혔다. 벌써 오 년 넘게 얼굴을 보고 있는 이인선 선임이었다. 날 위아래로 한번 훑은 그녀는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땀을 이리 흘렸냐며 조금 놀라더니 이내 차분히 연구실로 이끌었다. 나는 앞서가는 이 선임의 팔에서 천천히 위로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몸은 벌써 하얀 실험복으로 덮여 있었다. 프로젝트에 착수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자, 평소 느긋한 성정의 그녀도 근래 들어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른바 <바다숲 프로젝트>. 전세계적으로 사막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지금, 극한의 기후조건 속에서도 버틸 식물종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였다. 더 나아가선 독과 유해가스, 기준치 이상으로 오염된 어떤 척박한 토양에서도 최소한의 빛과 수분으로 뿌리를 내림과 동시에 끈질긴 생명력, 번식력을 가진 유전 인자를 모든 식물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발현시키는 게 최종 목표였다.
연구소 사람들은 사막에서도 뿌리내릴 씨앗, 유전인자에 ‘마더’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자연의 광활함이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초록장벽 건설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샤머니즘을 딱히 신봉하지 않는 나로선 크게 이해되는 작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간절함은 모두와 같았기에 ‘마더’라는 이름은 금세 입에 붙었다.
물론, 간절함이 진실로 보답 받는 일은 드물었다. 이 선임은 42차 배양실험에 몰두한 지 한 달 만에 손을 뗐다. 나는 그보단 열흘을 더 버텼으나 결국 실패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노력은 성공과 비례하지 않았다. 오늘 역시 부질없이 흘러간 무수한 날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차트를 던지듯 책상에 놓고 짓무른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는 안 돼요. 온실 파종으로도 발아율이 겨우 1%를 밑도는데, 노지로 가면 아예 답이 없어요. 20도 이상으로 올라갈수록 마찬가지라 사막은 더더욱 그렇고요.”
“뿌리 표피 세포 강화는 성공하지 않았어?”
“했죠, 65%정도만. 그조차도 생장조절제로 발아 일수 단축해 봤자 버티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에요.”
“저번에 2팀에서 플라나리아에 유전자 결합한 건 아직 결과보고 안 나왔나?”
”오늘 오전까지 메일 보내준다고 했어요. 한번 확인해 볼게요…… 아, 왔네요.”
마우스를 딸깍거리자 이 선임이 의자바퀴를 끌어 내 옆에 붙었다. 그녀는 콧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는 것도 잊고 모니터를 훑었다. 볼펜 꼭지를 눌렀다 떼는 소리와 마우스 클릭음이 반복해서 울렸다. 몇 번의 계산을 시도한 끝에 우리는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다시 미궁에 빠졌다.
“군집을 포기하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요?”
“발아율을 끌어올릴 순 있긴 해. 하지만 번식률이 현저히 떨어질 거야. 앞으로 토양상태는 더더욱 악화될 텐데, 끝까지 버틸 힘이 필요해. 당장 눈앞의 결과에만 치중했다간 나중에 더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라. 우리의 시간과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 만큼은 피해야지.”
“그래도 일단 국소면적에 정착시킨 뒤 뿌리를 강화한다면…… 아, 시간적으로 리스크가 너무 크네요. 비용도 지금보다 만만치 않을 테고…….”
나는 생장조절제의 배합비율을 조정해 결과를 다시 가늠해보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대체 어디부터 다시 손대야 할지 이젠 감도 안 와요.”
“그러게나 말이다. 차라리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는 게 더 빠르겠어.”
단순한 농으로 끝날 게 아니라 8년 후면 실제 상황이 될 말이었다. 그게 뭐가 웃긴지 이 선임은 낄낄댔다. 나는 그녀를 뒤로 하고 행정 관리 파일을 찾아 책장을 뒤적거렸다. 해마다 줄어드는 지원금으로는 현 연구를 유지할 수 있을지 조차 불확실했다. 가망 없는 일에 투자한다는 건 낭만이나 마찬가지였고, 이 시대는 그런 낭만을 용납하지 않았다.
초장엔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정부도 차츰 한계를 인정해가는 추세였다. 프로젝트를 부여 받은 전국의 연구소들 역시 이젠 무더기로 폐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자리잡은 이곳도 머지않아 그들과 운명을 같이할 지 몰랐다. 이미 충분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의 정확한 예시를 보여주고 있는 꼴이었다.
이 연구는, 일단 소행성 충돌에서 인류가 살아남았다는 가정을 전제로 시작되는 것이니까. 우리가 살 땅을 보존한다는 건 우선적으로 보존할 땅이 남아있을 경우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연구소의 위태로운 존속은 희망을 아직 가지고 있다는 동시에 잃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아 죽겠다, 신 전임, 잠깐 바람 좀 쐴까?”
뜨끈뜨끈 열이 오르는 머리만 붙잡고 있자니 이 선임이 요란하게 기지개를 키던 팔을 그대로 쭈욱 뻗어 문가를 가리켰다. 나는 침울한 표정 그대로 그녀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