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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로 Sep 18. 2024

5. 남겨진 사람들(1)

2031년, 겨울


종말은 명제였지만 삶은 현재였다. 힘들 땐 좀 정지 버튼을 눌러 멈추거나 브레이크라도 밟게 해주면 좋으련만. 영화도 게임도 아닌 삶은 쥐뿔도 없이 현재 진행형이었다. 혼란기와 과도기를 지나 쇠퇴의 안정기에 접어든 지금, 다소 궁핍한 형태로나마 사람들은 원래의 일상을 되찾았다. 일하고, 돈을 벌고, 그걸로 먹고 살고.

나라고 다를 바 없었다. 오늘은 엄마의 기일이었지만 괜한 센치함보다는 배고픔을 더 느꼈다. 먹고 사는 게 가장 중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톱니바퀴처럼 굴러가고 있었다. 지겨울 법도 한 굶주린 배는 꼬박꼬박 꼬르륵 소릴 냈다. 그럼 나는 실성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평등한 것이 있다면 죽음과 사랑과 허기일 것이라 여겼는데. 이제 와 보니 그 중 한 가지는 삭제해야 정답이 될 것 같았다. 죽음은 평등하지 않았다. 죽음은 엄마와 같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찾아왔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이들에게 가장 가혹했다.

그를 깨우치는 덴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주위를 둘러보는 정도의 고갯짓이면 알 수 있었다. 온 거리에서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는 버려진 행성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나는 메신저 백을 어깨에 가로질러 멘 채 녹슨 자전거에 올라탔다. 현재시각 오전 8시 30분.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빠져나와 한때 공원이었던 흙길을 쭉 타고 나가면 8년 째 근무 중인 연구소가 나왔다. 이젠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출근길이었다. 간혹 광인을 마주치는 이벤트가 무작위로 발생한다는 것만 제한다면. 그리 생각하기가 무섭게 낯익은 미치광이가 두어 블록 앞에서 불쑥 등장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바짝 벌리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멸망! 부흥! 주여, 종을 울리소서! 주께서 너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리라! 문명은 흥하고 망하고 성하고 쇠하지. 우린 반복되는 굴레에 갇혀 있는 게야! 아무도 벗어날 수 없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그는 등을 한껏 옹송그리며 기침을 터뜨리는가 싶더니 다시 술병을 쭈욱 들이키고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걸걸한 소란이 반대편 도로로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 바퀴가 차르르륵 돌아가면서 희미한 메아리도 같이 뇌중을 윙윙 울렸다.


우린 반복되는 굴레에 갇혀 있는 게야. 아무도 벗어날 수 없어…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아무것도…….


신호등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메아리는 계속 귓바퀴에 머물렀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쓴 물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엔 미치광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날 발견했다.


‘변하는 건 없어.’


남겨진 사람들에겐 더 이상의 구제도 구원도 없었다. 그것은 마치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는 듯, 운명이란 티켓을 쥔 탑승자들은 백 년은 거뜬할 식량과 함께 우주선에 몸을 실은 채 일찌감치 지구를 떠났다. 지면을 박차고 솟아오르던 뿌연 연기 뒤에는 새 시대의 시작을 열 인류라는 거창한 대의가 따라붙었다.

마지막 우주선이 쏘아 올려진 날이 석 달 전이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우주선은 이제 없었다. 사람들도 더는 내일을 꿈꾸지 않았다. 꿈을 꾸는 데엔 많은 힘이 필요했고, 우리는 그런 사치를 부릴 힘이 없었다.

먹고 자고 입는 모든 것이 돈이었다. 그 돈이 부족했던 우리는 인류라는 타이틀조차 살 수 없었다. 인류와 비인류의 경계는 숨쉬는 일 만큼 간단하고 뚜렷했다. 얼마나 사람 답게 사고하는 뇌를 가졌는지 보다, 사람 답게 살 수 있는 돈이 얼마나 있는지가 더 중했다. 

누런 하늘은 날이 갈수록 뿌얘지기만 했다. 어디부터가 하늘이고 땅인지 점점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마치 신이 기만하듯 그어 놓은 뚜렷한 한계선을 지우고자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과연 이 퀘퀘한 땅에서 사는 것이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때때로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죽는 것이 더 편할 지도 몰랐다. 생과 사의 경계는 이다지도 불분명 했다. 

억울하게 공평한 죽음만 늘 코앞에 있었다. 매일같이 누구나의 귓가에 붙어 속삭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며, 배를 뒤집고 물 위에 떠오른 붕어의 눈을 가진 사람들을 쉬이 꼬드겨 데려가곤 했다. 죽음은 극복할 수 있는 종류도 아니었다. 그저 무뎌지길 기다려야만 했다.

물론 육체적인 감은 예리하게 벼려 놓을수록 좋았다. 나는 자전거의 속도를 슬슬 줄였다. 두리번거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으나 간신히 참아냈다.


‘뭐지?’


아까부터 와 닿는 느낌이 있었다. 묘하게 뒤통수가 따가웠다. 지금도 누군가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는 중이었다. 나는 속으로 셋을 세고 예고없이 확 돌아봤다. 동시에 검은 인영이 전선이 길게 늘어진 전신주 뒤 골목으로 재빠르게 사라졌다. 딱 걸렸어. 나는 그 뒤꽁무니를 허겁지겁 좇았다. 그러다 그만 자전거 바퀴가 돌부리에 걸리고 말았다. 자연한 수순으로 볼썽사납게 고꾸라졌다. 시야가 휙 뒤집혔다.


“아야…….”


엉덩이를 조금 움찔거렸을 뿐인데 꼬리뼈에 찌르르 불이 붙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찔끔 매달렸다. 반사적으로 땅을 짚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꼼짝 없이 사흘은 누워있을 뻔했다. 나는 쑤시는 허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자포자기 하고 바닥에 붙어있기로 했다. 어차피 보는 눈도 없거니와, 있다 해도 너무 아파서 당장 일어나진 못할 듯싶었다.

어느 정도 통증이 가시자 나는 양손바닥을 땅에 붙이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 왼손이 앞으로 주욱 미끄러졌다. 손바닥과 땅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 손을 치우니 텁텁한 흙바닥 한가운데 까맣고 반질반질 빛나는 표면이 보였다.


“……총알?”


그것을 들고 살피자 군데군데 묻은 사용감이 눈에 들어왔다. 첨단이 조금 우그러진 걸로 보아 이미 역할을 다한 탄피에 가까워 보였다. 다만 근처에 군부대나 특수훈련장도 없는 마당에, 당최 탄피가 출근길 한복판에 있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쓰레기들과 다를 바 없는 듯 그저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매끈한 금속덩어리에서 기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 시커먼 탄피 한 알이 마치 망망대해 속에서 발견한 값진 진주처럼 보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가져야만 했다.

나는 일단 탄피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뻑뻑한 청바지 주머니 끝에 걸린 손끝을 빼내자마자 위에서 굵은 남성적인 목소리가 떨어졌다.


“요새는 땅 파면 십 원 한 장 나오나요?”


나직하고 듣기 좋은, 아는 목소리였다. 덕분에 덜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녀석에겐 내가 하릴없이 흙바닥만 뚫어져라 헤집고 있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나도 본 적 없는 십 원 한 장을 네가 알아?”

“꼭 두 눈으로 직접 봐야만 아는 건 아니니까요. 그거 편견입니다?”


깨끗한 금발이 뭉툭한 햇살 아래서도 빛났다. 짙고 반듯한 눈썹 아래 자리잡은 푸른 눈은 옆으로 길게 늘어져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강 호. 2년 전 보조 연구원으로 들어와 이제 막 주임을 단 녀석. 그는 서글서글하고 모난 곳 없는 성격으로 원체 사람이 좋았으나, 무엇보다 그 빼어난 이목구비 덕분에 연구소의 비공식 아이돌이기도 했다. 나와는 다른 부서였지만 정부에서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며 내가 잠깐 사수 역할을 맡은 시기도 있었다.


“그래, 넌 뭐든 다 알아서 좋겠다.”

“그것 또한 편견이네요. 아직 모르는 것도 많아요. 배우기 위해 연구소도 다니는 걸요.”

“뭘 배우고 싶은데?”

“뭘 배우고 싶은지 배우는 걸 배운다고 할까요.”

“그게 무슨 궤변이야.”


내가 작게 툴툴거리며 무릎에 묻은 흙을 털자 강 주임이 겸연쩍게 웃었다. 가지런한 치아가 도톰한 입술 밑으로 희게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굴다가 그냥 뒤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통통한 꿀벌 엉덩이 같은 하늘이 빙빙 돌았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것처럼 가까워 보이는데 한없이 멀었다. 찌꺼기처럼 머릿속을 부유하던 생각이 불쑥 입밖으로 나왔다.


“이런 세상에서 살려면 아는 게 힘일까, 모르는 게 약일까.”

“글쎄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게 하나의 방법이 될 순 있겠죠.”

“모르는 척? 거짓말도 못하면서 네가 어떻게 모르는 척을 해.”

“전 못하는 거죠. 하지만 전임님은…….”


그림자가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허리를 숙인 강 주임이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안 하실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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