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손은 핸디캡이지만
내 손은 작다. 손이 작은 건 일상생활에서 불편할 정도로 큰 핸디캡은 아니지만, 피아노를 칠 때는 핸디캡이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칠 때 나는 도에서 도까지, 손가락이 닿지 않아 8도 화음을 한 번에 짚지 못하고 굴려 치곤 했다. 지금 내 손은 어린 시절보단 커졌지만 한 번에 짚을 수 있는 건 딱 8도 화음까지다. 9도 화음, 그러니까 도에서 레까지는 겨우겨우 건반 끝에 손가락을 걸치는 정도다.
피아니스트도 아니면서 나는 피아노를 칠 때마다 작은 손이 유감스럽다. 악보에 8도 이상 화음만 나오면 겁이 덜컥 난다. 이런 화음이 계속 나오면 손을 한껏 벌려서 치느라 힘이 들어가고 팔이 금세 아파진다. 겨우겨우 치더라도 미스터치가 작렬한다. 내 작은 손이 원망스럽다. 만약 피아노를 전공으로 했다면, 내 손을 미워했을지도 모르겠다.
피아노 전공하는 학생 중에는 손을 찢는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피부를 조금 찢어서 손을 더 크게 벌릴 수 있도록 해주는 수술이라고 했다. 오래 전에 들은 얘기인데 진짜 그런 수술을 했다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 어쨌거나 이런 수술 얘기가 나온다는 건 손 크기가 피아노 치는 데 중요하다는 는 방증이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10도 화음을 여유있게 짚을 정도로 손이 크다. 특히 손이 큰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사람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다. 손 크기가 무려 13도에 이르렀다고 하니, 도에서 한 옥타브 높은 도 넘어 라까지 쳤다는 거다. 그가 왼손으로 도-미 플랫-솔-도-솔, 이렇게 다섯 음을 한번에 짚는 걸 봤다는 증언도 남아있다. '성큼성큼'이라는 수식어는 손보다는 발에 쓰는 말이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손은 건반 위를 그야말로 '성큼성큼' 오갔을 것 같다.
프란츠 리스트 역시 13도까지 짚는 큰 손으로 어려운 곡도 수월하게 쳐내는 피아니스트였다. 라흐마니노프와 리스트는 작곡가이기도 해서, 스스로 복잡한 화음이 난무하고 스케일이 큰 곡을 쓰고, 자신의 곡을 큰 손으로 가뿐하게 쳐내곤 했다. 요즘 피아니스트로는 랑랑의 손이 12도 정도, 조성진의 손도 영상을 보면 11도에서 12도 정도는 소화하는 것 같다.
하지만 손이 작다고 해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니엘 바렌보임,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는 9도 정도로 손이 작은 피아니스트로 꼽힌다. 옛 자료를 뒤지다 보니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의 손 크기는 심지어 8도였다고 나온다. 믿기지 않았다. 8도라니! 겨우 한 옥타브 짚는 정도였다고? 그럼 나와 손 크기가 비슷한 거잖아? 스크리아빈이 쓴 피아노곡은 한 번도 쳐본 적이 없는데, 한 번 도전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스크리아빈은 9도 화음 이상 손이 커야 칠 수 있는 곡도 썼지만, 스스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폴란드 출신으로 1차 대전 때 미국으로 이주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요세프 호프만은 손이 작았지만 완벽한 테크닉과 강력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 스타인웨이에서는 호프만을 위해 건반 규격이 작은 '전용 피아노'를 특별히 만들어주기도 했다. 호프만을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라고 높이 평가했던 라흐마니노프는 1909년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3번을 그에게 헌정했다. 라흐마니노프는 호프만이 이 곡을 초연해 줄 것을 원했지만, 정작 호프만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곡이라며 공개 석상에서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도 손이 작아서 고민한 적이 있을까. 어쩐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최근 몬트리올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김수연을 인터뷰했다. 김수연은 쇼팽 콩쿠르에서도 본선 3라운드까지 오르면서 전세계 음악 팬들의 응원을 받았는데, 연주 영상을 보니 손이 그리 크지 않았다. 유튜브 댓글 중에도 '손이 작은 것 같은데 대단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네, 맞아요. 피아니스트 치고는 손이 작은 편이에요. 그런데 손은 작지만 유연성이 있어서 잘 늘어나요. 쫙 펴면 도에서 미까지는 가요. 한 번에는 짚지는 못하지만 이어서 칠 수는 있죠."
김수연은 손가락을 펼치면 10도까지 닿긴 하지만 화음을 편하게 짚는 건 9도 정도라고 했다. 혹시 손이 작아서 약점이라고 느낀 적은 없는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여자고 몸집이 크지 않다 보니, 큰 코드 치고 옥타브 많이 나오는 거 칠 때는 연습이 많이 필요해요. 남들은 쉽게 치는데 저는 힘을 끌어내서 쳐야 하니까요. 손이 크고 두터운 사람은 두터운 소리도 잘 내죠. 그런데 저처럼 손이 크지 않아서 좋은 점도 있기는 해요. 정교한 부분, 가까이 있는 음 칠 때, 반음계 스케일 같은 거 할 때는 손이 작은 이점이 있어요. 다 장단점이 있죠."
손이 작은 게 장점이 될 때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김수연의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다. 손이 작다고 불평만 할 게 아니었다. 역시 손이 작은 피아니스트 이경미는 자신에게 맞는 레퍼토리를 고민하다 보니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가 되었다며, 손이 작다고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 나는 직업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사람은 아니지만, 평생 피아노를 치면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이왕 이렇게 타고난 거, 작은 손 탓하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