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책에는 뒷면에 정답이 없어
KBS 명견만리에 ‘세상에 없는 직업, 만들 준비 됐나요?’ 주제로 발표하기 위해 출연했을 때의 일입니다. 같은 날 석규라는 이름의 한 중학생 역시 프리젠터로 참여하였는데, 대기실에서 이야길 나눠보니 이 친구는 이미 초등학교 때 이 프로그램에서 방청객으로 참여하였다가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던 유명 인사였습니다.
‘4번 놀란 초등학생’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당시 석규 군이 방송에 출연하여 프리젠터에게 질문한 영상과 글이 줄이어 나옵니다. 수능 문제를 풀어본 초등학교 6학년 석규는 4번 충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 1
"사람에 따라 답이 다양하게 나올 거 같은데,
정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는 것에 처음 놀랐고요.”
# 2
“문제를 푸는 '방법'이 있다는 것 두 번 놀랐어요.”
# 3
“또 이 어려운 문제 많은 분들이 한 문제 이상 맞힌 것에 세 번 충격을 받았고요."
# 4
"마지막으로 제가 앞으로 풀어야 할 문제라는 사실에 네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이는 청중을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이 수험생이 될 때쯤이면 하나의 정답만 강요받는 것이 아닌, 다양성을 존중 받는 세상이 될 수 있을까라고요.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어른들은 모두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으니까요. 앳된 얼굴을 한 아이의 진심어린 물음에 꼭 답해주고는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요.
중학생 석규 군은 더 용감해졌습니다. 학원 쫓아다니느라 바쁜 또래와는 달리 한결 더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 제 눈에는 기품 있어보이기까지 합니다. 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는 대신 팟캐스트로 인문학 공부도 하고, 항공기 모형도 만들고, 관심분야인 항공분야에 대해 알아보며 여가생활을 즐긴다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친구들조차 쓸데없는 일 그만하라고 훈수를 둔다는데.. 석규 군은 이번에도 되려 어른들에게 묻더군요.
어떻게 중학생이 쓸모있는 일만 하나요?
열네살은 쓸데없는 일을 해야 할 나이 아닌가요?
석규 군을 보면, 산울림의 리더이자 배우인 김창완 아저씨가 생각납니다. 그가 한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의 중학교 시절 고민을 털어놓은 것을 보고 오랫동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한참 세상에 눈떠 갈 무렵의 10대 소년은 무작정 길가는 어른들을 붙잡고 던졌다고 합니다.
“왜 사세요?”
그런데 그가 만난 어른들은 하나같이 '너도 커보면 알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공부나 해'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고, 누군가 한사람쯤은 제대로 된 답을 가지고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어린 마음에 너무도 실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어른들을 너무 믿지 마세요. 여러분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는데, 그 커다란 우주를 열어줄 어른은 많지 않아요. 또 그런 어른이 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내가 잘 알고... 믿지 말라고 해서 세상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어른들의 말에 절대로 갇히지 말라는 뜻이에요. 여러분은 우리보다 훨씬 큰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무작정 어른들의 말에 좇아서 따라가지 말고 여러분의 손으로 또 다른 세상을 열어보세요.
그의 노래 가사처럼 열두살은 열두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 뿐이고, 미리 알 수 있는 건 하나 없고 다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게 인생일진데.. 어른들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이미 정해놓은 정답 안에 가두어놓으려고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리고 아이들마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른들이 권하는 하나의 길만을 정답이라 생각하는 것을, 저는 초등학교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됩니다.
벌써부터 서열화된 대학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으며, 안정적인 직장 혹은 엄청난 부와 명예 등을 자신의 꿈이라 말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하나의 획일화된 정답을 찾는다는 증거로 ‘꿈’에 대한 접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초등학교 벽을 가득 메운 아이들의 꿈, 아니 장래희망은 어느 학교할 것 없이 직업명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게 뭐가 문제냐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벽에 붙여진 그것을 볼 때마다 아이들의 꿈마저도 네모 안에 가두워놓은 하나의 정답지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사실 꿈이 직업일 수는 없고, 반드시 직업이어야 할 필요도 없는데 말이죠.
한 때 제 소원 아닌 소원은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꿈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우주 정복’이라거나, ‘숲 속에 사는 티라노 공룡’이 되고 싶다거나, ‘귀여운 햄스터’가 된다거나, 동화 속 마을을 여행해보고 싶다거나, 원숭이와 야외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등 때를 밀어준다거나.. 다소 엉뚱하고 천진한, 혹은 기상천외하기까지 한 아이다운 대답을 들어보는 것이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초등학생만 되어도, 아이들은 이미 어른들이 정해놓은 네모 안에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가두어버리는 건 아닌지 늘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아쉬움을 품고 있던 중, 아주경제신문 명예기자로 왕성한 활동력으로 각계 인사들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고등학생 김호이 군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호이 군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꿈을 적으라고 했을 때 ‘외계인’이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절대 이뤄질 수 없는 허황된 꿈이라며 당장 지우라 했던 한 어른의 이야기에 호이 군은 어린 마음에 “이런 꿈은 꾸면 안 되는 거구나.”하며 접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꿈이 잊혀지려던 무렵, 소년은 고등학생이 되어 ‘2033년 지구인 최초의 화성인’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인 엘리사 카슨이라는 소녀를 인터뷰로 만나게 되었고, 소녀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더랍니다.
자신의 꿈을 믿어주는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꿈을 포기하지 마라.
아무리 미친 소리처럼 들려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루려고 도전하는 정신이 중요한 것 같다.
아이들과 명사형 꿈(장래희망)이 아닌, 동사형 꿈(~하고 싶다.)을 이야기하며 각자의 꿈 목록(Bucket List)만 작성해보아도 이렇게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말이죠. 그저 그 나이에 맞는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기회만 주어도 아이들은 한결 자유롭고 행복해보였습니다.
BUCKET LIST
내가 좋아하는 작가 <로알드 달> 책 시리즈 전부 읽기
하루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굴거려보기
우리집 새가 알 낳는 것을 직접 관찰하기
어린이 과학기자로 매미의 일생 관찰하기
동생과 작년보다 더 친하게 지내기
방학에 검도 배우기
해리포터 영어로 한 권이라도 읽어보기
줄넘기 걸리지 않고 30개 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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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이 수능 언어영역에 출제된 자신의 시 ‘아마존 수족관’ 에 관한 문제를 단 하나도 맞히지 못했던 일이 크게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습니다. 시 한 편 안에 들어있는 시인의 세계관도, 그를 둘러싼 해석도 다양하게 마련일텐데, 하물며 우리 삶에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그 하나의 길을 따라가길 주문하며, 단 한번밖에 없는 유년기를 유예하기를 강요하는 사회, 이대로 괜찮을까요? 최소한 열두살은 열두살답게, 열여섯은 열여섯답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 사회학자의 말대로 ‘죽도록 노력해 모두가 똑같이 평범해지기’가 우리의 지상 목표가 아니라면 말이죠.
▶ 더 자세한 내용은 출간될 책(백다은의 교육상상 Reimagine Education)과
원격연수 티쳐빌 www.teacherville.co.kr 에서 추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해볼 수 있는 활동자료도 함께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