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상상’ 한 스푼]순풍태교법, 콩 당첨? 천하장사처럼 튼튼해져
고등학생 때 평일 밤 9시 15분은 하루 중 제일 달콤한 시간이었다. 학원에 다녀와서 씻자마자 TV 앞에 앉기 바빴다. 순풍산부인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날마다 용녀용녀 여사님 찾기 바쁜 오지명 원장부터 아름다울 미, 달할 달, 미달이까지, 선명한 캐릭터들이 펼치는 환상적 케미에 배꼽 빠지게 웃다보면 어느새 엔딩 시그널이 들린다. 끝날 때의 그 아쉬움은 ‘얼른 내일 이 시간이 왔으면’ 기다림으로 바뀌기에 충분했다.
25분 남짓한 그 시간은 입시 스트레스에 유일하게 숨통틀 수 있게 허락된 것이었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서 시간이 많아질 때 꼭 정주행하겠다고 결심 아닌 결심을 했다. 그리고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 때는 뜻밖에도 아이를 임신하고 집에서 안정을 취하던 때였다. 순풍산부인과 정주행, 일명 ‘순풍태교’를 시작했다.
시트콤 덕후인 나만큼이나 순풍 캐릭터들 하나하나의 매력을 다 꿰고 있는 남편과 공통적으로 꼽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지금봐도 레전드라 입을 모아 꼽은 에피소드 중 하나, 바로 순풍산부인과 508화 ‘정배의 편식습관 고치기’ 편이다.
의찬이네 집에 놀러온 정배가 밥에서 콩을 골라내며 편식하는걸 보고 오중과 창훈은 콩을 많이 먹어야 천하장사처럼 힘이 세진다며 콩을 권한다. 하지만 정배는 며칠동안 아무리 콩을 많이 먹어도 힘이 세지지 않자 다시 이들을 찾아온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오중과 창훈은 특별히 당첨되는 콩이 따로 있다며 거짓말을 지어낸다. 당첨콩이 외관상으로는 다른 콩과 다를 것이 하나 없어서 꾸준히 먹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처음엔 절대 속지 않겠다던 정배였건만, 두 삼촌의 덫에 단단히 걸려들었다.
“콩말고 다른 건 당첨 되는게 또 뭐가 있어요?”
“파! 파를 먹다가 당첨되면 손이 무지 빨라져서 뭐든지 할 수 있게 돼.”
“당근 먹다가 당첨되면 발이 이렇게나 빨라져.”
“양배추 먹다 당첨되면 몸이 유연해져서 써커스하는 사람처럼 된다.”
“시금치 먹다 당첨되면 귀가 밝아져서 예민한 소리까지 다 듣게 된다구.”
“정~~말요?”
그 특유의 순진한 표정에 재미를 붙인 두 삼촌의 거짓말에는 점점 더 탄력이 붙는다.
오중 : 형, 난 뭐니뭐니해도 제일 당첨되고 싶은 건 버섯이야, 버섯!
창훈 : 이야, 버섯 환상이지!
정배 : 버섯은 뭔데요?
오중 : 버섯 먹다 당첨되면.. 놀라지마, 니가 10명으로 늘어난다?
정배 : (크게 놀라며) 네에에? 정~~~말요?
오중 : 그럼그럼, 옛날에 친구 중에 버섯 먹다 당첨되어서 10명으로 돌아다니는 거 본 적 있는데, 얼마나 부러웠다고. 한 놈은 숙제하고, 한 놈은 티비보고, 한 놈은 축구하고...
정배 :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창훈 : 골고루 먹다보면 언젠가 뭔가 꼭 하나씩 당첨되지.
오중 : 엄마 주시는 거 거르지 말고 뭐든 골고루 먹어야 돼.
놀라우리만큼 정배의 음식 골라내는 습관이 고쳐지고 있었지만, 미역 앞에선 소용없었다. ‘미역은 먹어도 당첨되는 것도 없어.’라며 투덜대던 정배의 볼멘 소리를 듣고 정배 엄마는 오중과 창훈에게 미역도 잘 먹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SOS를 청한다. 하지만 이제 정배 길들이기 쯤에는 선수인 노련한 두 삼촌이다. 오중의 음식 당첨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혀를 내두를 정도가 되었다.
미역에 당첨되면 바닷 속에서
숨 안 쉬고 헤엄칠 수 있어.
나 초등학교 3학년 때 당첨되어서
용궁에도 다녀왔잖아.
어느새 정배는 자신도 거북이 등을 타고 바닷 속을 탐험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 사랑스러운 표정을 보고서 입가에 미소를 띄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이 에피소드가 특별히 더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당첨’이란 말이 이렇게 평범한 식탁 앞에서도 쓰일 수 있단 포인트가 신선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꼭 복권만이 ‘당첨’과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조합이 아니었던 거다.
시트콤을 특별히 더 애정하는 이유와도 겹친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일들을 재치있으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우리를 살맛나게 만드는 인생은 대단한 한방이 아닌, 결국 이런 소소한 일상들의 합일 테니까.
<시트콤같은 내 인생>
by 백다은
<고독한 미식가> 뺨치는 글로컬 동네맛집 탐방가에, <천사들의 합창> 시릴로의 순애보를 응원하고, <순풍 산부인과>정배의 순수함이 늘 보고싶고 그리워 태교까지 순풍으로 했다.
<브레드 이발소> 빵 한 조각과 우유에 담은 상상력을 사랑하며, <찰리브라운> 별볼일 없는 찌질한 캐릭터가 언젠가 빛을 보는 뻔해보이는 클리셰도 좋아하고, <노다메 칸타빌레> 엉뚱한 노다메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일상 속에서 켜켜이 쌓아온 타인의 지층들을 발견하는 일이 즐겁다. 조조영화, 돌체라떼 한 잔, 아삭한 사과 한 입에 아침이 기다려지는 소시민.
무의미하게 지나갈 수 있는 일상 속
‘달달’ ‘낭만’ ‘상상’ ‘열정’ ‘감동’ ‘엉뚱’
한 스푼을 더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