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필
세계에서 주인이 되는 게 너무 어렵다.
이 영화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정면으로 비추면서도, 그들을 오직 상처로만 규정하지 않는다. 주인공 이주인은 명랑하고 밝다 못해 조금은 과한(?) 개구쟁이다. 또래 남자애들과 장난도 잘 치고, 틱톡 찍고, 태권도 하고, 그냥 평범하게 열여덟 살을 산다. 그래서 더 낯설다. “저렇게 잘 웃는 아이가 피해자라고?”라는 우리 안의 고정관념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 중반부, 세차장 장면에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기계식 세차기 안, 물과 솔이 차를 뒤덮는 좁은 공간. 주인이는 엄마에게 울부짖듯 묻는다. 왜 나를 지켜주지 않았냐고. 가까운 친척인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할 때, 엄마는 왜 눈치채지 못했냐고, 왜 나만 그 시간을 버텨야 했냐고. 미친 듯이 소리치는 딸 옆에서 엄마는 같이 오열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휴지와 물을 건네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한 바퀴 더 돌까?”
이 한 문장이, 두 사람이 지금 겨우 버티고 있는 인생의 무게를 다 보여주는 것 같다.
같은 반 남자인 수호는 여동생을 사실상 혼자 돌본다. 아빠는 바쁘고, 엄마는 집에 없다. 어린 여자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불안이 수호 몸에 그대로 박혀 있다. 그러던 중 집 근처에 아동 성범죄자가 출소 후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학교에서 성범죄자 거주 반대 서명을 시작한다. 서명지 위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성폭행은 피해자의 삶을 망가뜨린다.”
“성폭력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수호는 마지막까지 주인이에게 서명하라고 다그친다. 그런데 주인이는 끝내 거부한다.
“성폭력 피해자가 영혼이 부서지고 일상이 끝장난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너무 극단적이야.”
내 삶은 분명 상처 입었지만, 그렇다고 “망가진 인생”으로만 설명되는 건 싫다고 버틴다. 수호는 “당연한 말 아니냐”며 맞서고, 둘은 말싸움하다 결국 몸싸움까지 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주인이가 “나도 성폭행 피해자야”라고 내뱉은 말은 농담처럼 치부되다가, 곧 학교 전체에 사실로 퍼져 버린다.
주인이는 그대로다. 웃고, 연애하고, 친구들이랑 싸우고, 봉사활동도 가고, 태권도도 한다. 달라진 건 주변이다. 친구들은 “그런 일을 겪었는데 왜 저렇게 태연하지?”라며 수군거리고, 어떤 아이는 “오히려 너무 밝은 게 더 이상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배려하는 척하면서 거리를 두고, 누군가는 불편함을 숨기지 못한다. 주인이는 어느 순간 ‘인싸’에서, 함께 지내기 애매한 ‘어려운 존재’로 변한다. 피해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영화는 끝까지 가해자를 클로즈업하지 않는다. 범행 장면도, 가해자의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이 넓은 세상에서 스스로 ‘주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따라간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배가 찢어지는 엄마, 딸에게 미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산속으로 사라져 버린 아버지, 사랑받아야 할 막내임에도 누나를 지키기 위해 어른이 되어버린 동생, 그리고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이 다양한 생존자들. 이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상처,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만 본다. “다 잊어야지”, “극복해야지”라는 말 뒤에는, 상처를 빨리 정리하고 과거에 가두려는 마음이 숨어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이주인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그 사건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도, 그 안에서 여전히 사랑하고, 싸우고, 웃고, 실수하면서 산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문장은 이거다.
우리는 상처를 지닌 채로도, 여전히 자기 삶의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