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 정상에서
다음 사람에게 석양감시를 맡기고 나니 설치된 망원경이 눈에 들어왔다. 두 눈두덩이를 살며시 붙여서 인천대교를 건너는 차들을 감시했다. 차의 번호판은 보이지 않지만 도로에 걸린 초록색 이정표는 눈앞에 있는 것 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렌즈의 방향을 틀어 내가 사는 건물을 바라봤다. 발코니에서 뭘 하는지 알아 챌 수 있을 정도로 자세히 보여서 놀랐다. 정상에 오른 누군가가 발코니에서의 내 기행을 봤을까봐 조마조마했다. 그리고 무릎을 한껏 접고 노을이 지는 곳을 찾았다. 그건 아무리 당겨보아도 멈춰있는 그림처럼 변화가 없었고 한없이 멀어보였다.
멀리 떨어져있는 것들을 눈앞에 당겨보면서 본다는 것과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보고싶다는 것,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거의 완벽한 디지털 시대를 살고있는 나는 영상통화와 남겨진 동영상을 가지고 위에서 말한 문장들을 의미를 살펴봤는데, 망원경 렌즈를 코 앞에 두고 생각하려니 별안간 모든게 복잡해졌다.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렌즈에서 슬며시 눈을 뗐을 때 저 멀리 공항 근처의 건물들이 어느틈에 반짝이는 불빛을 내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오고 나서야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일지 아니면 에너지 절감이 중요하니까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불이 들어온 것일뿐인지 궁금했다. 화려한 공항의 정 반대편 하늘에는 하얀색 별 하나가 떠있었다.
혼자만 반짝이는게 참 특이한 별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정말 모양이 * 이렇게 별처럼 생겼길래 너무 완벽해서 가짜같았다. 나는 다시 망원경을 잡고 별이 있는 곳을 향해 방향을 틀었는데, 자세히 보니 하나의 빛이 아니라 두개의 빛이었다. 가만히 더 들여다보니 양 옆으로 바늘로 찌른 것 만큼 작은 빛이 새어나왔다. 총 네개의 하얀 불빛이었는데, 정면으로 날아오는 비행기처럼 보였다. 아니면 후면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비행기의 구조에 대해서 전혀모르니까 비행기도 자동차 깜박이처럼 후미에 불이 들어오는지 알리가 없다. 하여간 좌우대칭으로 빛이 달린걸 보면 측면은 아닌게 확실했다. 내가 아는 비행기 불빛은 항상 깜빡거리면서 작아지거나 커지는데 이건 깜박이지도 않아서 하늘에 박혀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내가 두번째로 길을 물었던 두명의 등산객이 헉헉거리며 정상으로 올라왔다. 나처럼 길을 모르는 네명의 사람들이 결국에는 어찌저찌 자기만의 방향을 찾아서 같은 곳에 올라왔다. 산이래봤자 동산이라고 불리는 동네 뒷산이지만 하나밖에 없는 장소에 모두 도착했다는 사실이 못내 자랑스럽기도 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도 조용한 정상을 내어주고 싶었기에 아늑한 풍경들을 모두 내려놓고 뒤돌아 내려왔다. 턱을 괴고 노을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등산객은 내가 갈때까지 변함없이 그 벤치에 앉아있었다. 만약 등산을 같이할 친구가 생긴다면, 매번 똑같은 정상일지라도, 산을 오르고 내릴 때 들인 시간만큼 머물다 갈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려오면서 마지막 남은 빛으로 본 풍경은 이런 거였다. 내가 사는 길다란 건물 위로 섬하나가 솟아 있었고 그 바로 위로 석양이 남기고간 붉은 빛이 쌓인 모습. 올라오는 길에 봤던 석화껍데기같은 나무 껍질이 떠올랐다. 전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들이 시간에 밀려온듯 한 곳에 차곡차곡 쌓인 모습이 어쩐지 닮아보였다. 각자의 길을 택해 백운산 정상에 도착한 등산객들도 모두 나무 껍질 같았다. 나는 내려가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사는 건물과 석양, 그 사이에 낀 섬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산에 설치된 지도에서 섬의 이름만 확인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고 저기고 섬이 너무 많았다. 2번 섬인지 아니면 그 옆의 6번 섬인지 영 헷갈렸다.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매칭시켜 보는데도 지도에 인쇄된 사진은 몇년 전부터 업데이트가 안되었는지 이 동네에 막 이사온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물이 별로 없었다. 사진속에선 고등학교 한두개를 빼고 모두 허허벌판이거나 공사중인 건물들 뿐이었다. 내가 사는 건물도 지도엔 없었다. 지금도 운서동의 빈땅은 매일이 공사중이니 몇년 후에 돌아오면 여기도 내가 알던 곳이 더 이상 아니겠구나 그런 쓸쓸한 생각도 스쳤다. 그리고 그때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이 낡은 지도를 보고 섬의 이름을 찾으려다간 고생 꽤나 하겠구나 생각하며 터덜터덜 내려왔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