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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돌비 Mar 07. 2022

솔방울에 뭐 먹을게 있을까

백운산에 어둠이 내리면

정상에서 내려와 산 길 안쪽으로 들어서자 밤이 되었다. 그래도 촘촘하게 어둠을 채운 나무들에 비하면 하늘은 여전히 푸른빛으로 밝아보였다. 오늘의 탐험을 곱씹으며 걷는데, 등산을 하려던 작은 결심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만 나를 데리고 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다 마치기도 전에 눈 앞은 점점 어두워지고 산을 오를 땐 나지 않던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빛이 있을 땐 들리지 않던 작은 부스럭거림, 내 패딩이 스치는 소리,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소리 같은게 한층 더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 말고 이 산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칠때쯤 어디선가 나무를 갉아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가까이 귓전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산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위험하고 큰 동물을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아는 지식이 없어서 상상이 어려웠다. 그나마 언젠가 백운산의 대낮에 본 딱다구리가 생각났는데, 지금 들리는 소리는 부리로 쪼는게 아니라 갉는 소리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임을 멈추고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 확인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왼쪽이었다. 눈앞에 확인하게 될 것이 두려워서 정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나무를 바라보는데, 여전히 소리만 보였다. 그러다가 나뭇잎이 살짝 움직이더니 다람쥐의 엉덩이처럼 생긴게 나뭇가지에 반쯤 가려진게 보였다. 다람쥐일까? 청설모일까? 궁금하던 찰나 갉아대는 소리가 멈추고, 정적이 찾아왔다. 정적을 깬 건 땅바닥으로 툭 떨어진 솔방울이었다. 내가 솔방울을 바라보는 틈을 타서 청설모는 옆 나무로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이 모든 상황을 모르고 아직도 솔방울을 갉아먹는 다른 한마리는 그제서야 눈치를 챘는지 똑같이 솔방울을 바닥에 내팽겨치곤 옆 나무로 건너갔다. 이번엔 솔방울 대신 청설모를 쫓았다. 뚜렷한 실루엣에 놀라서 '우와 청설모'하고 혼잣말을 내뱉자 귀에 있던 가는 털들이 하늘을 향해 뾰족 솟아올랐다. 애니메이션에서 본것처럼 놀란 청설모의 꼬리는 재빠르게 느낌표와 물음표를 오갔다. 파란 밤 하늘을 배경으로 가닥가닥 섬세한 실루엣이 보였다. 행동이 재빨라서 도망쳐나온 그림자 같기도했다. 나는 두 마리의 청설모들이 너무 귀여워서 집에가기 싫었는데, 아무리 뚫어져라 바라봐도 눈코입의 대략적인 위치조차 파악이 안될 정도로 어두워져서 포기해야 했다.


마른 솔방울에 뭐 먹을게 있을까? 나름대로 궁리하며 걷는데, 불과 몇십분 전에 걸었던 길을 거꾸로 되짚어 돌아가는 모습과 아침이 오기 전 새벽처럼 파래진 밤하늘을 바라보니 시간을 역행하는 것 같은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다. 산을 빠져나와 멀리 길가의 가로등이 보이고 나서야 오늘의 산행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 다채로웠으며, 백운산이 나에게 선물을 준 날이었구나 싶어 새삼 고마웠다. 마음 속으로 산과 모든 것에 감사했다.


거리에 켜진 하얀 가로등 빛을 보면서 이십년도 더 전에 고향 뒷산을 가족들과 오르던 기억을 떠올렸다. 밤늦게까지 배드민턴을 치고 코트의 하얀 조명을 손수 끄고 내려오던 시절 말이다. 어쩌다가 밤에 산을 내려오는 기분을 잊고 살게 된걸까? 밤에는 산에서 전혀 다른 소리가 들리고 전혀다른 향기가 난다는 당연한 사실을 왜 오래도록 떠올리지 못했을까. 이 생각마저 날아가지 않게 오늘은 꼭 글로 남겨놔야지 생각하며 흙묻은 발걸음을 옮겼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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