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에 흘리고 간 것들
여기서부턴 길이 딱 하나 뿐인데도, 나같은 사람들이 길에서 혹여나 벗어날까봐 양쪽으로 세워진 말뚝에 굵은 줄이 쳐있었다. 말뚝의 높이가 한참 낮은 걸 보면 잡고 걸을 수도 없는 줄이었다. 아마 등산객의 한발자국도 길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누군가의 고집같았다. 그 길을 따라 걷던 어떤 사람은 새에서 빠진 깃털처럼 스카프를 흘리고 간 듯 했다. 새파란색의 시폰소재였는데, 손톱보다 작은 하얀 잔꽃이 그려진 앙증맞은 천이었다. 떨어트린 사람도, 그걸 탈탈 털어다가 잘보이는 밧줄 한쪽에 가지런히 묶어놨을 사람도 어쩐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반면 이리저리 밟히고 치인 파란색 립밤도 보였다. 주인이 오던길을 돌아와 다시 찾아낸다고해도 입술에 바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고작 몇걸음 걷는다고 산에다가 이것저것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로부터 빠져버린 깃털 비슷한 것들을 이렇게 마음 속에 하나하나 주워담으며 산을 올랐다. 하나로 난 길은 생각보다 짧았고,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마지막 경사진 언덕이 눈에 보였다. 아주 짧은 구간이지만 제법 경사가 있어서 다리에 힘을 딱 주고 흙 속에 박힌 돌을 밟고 올라가야했다. 그리고 그 고생을 마치면 가장 값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내가 꼽은 가장 값진 풍경은 정상에 오르기 직전에 마련된 평평한 언덕같은 곳이다. 여기야 말로 내 마음 속에선 백운산의 정상이다. 이곳에서 보는 영종도의 경치는 산꼭대기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시야를 가리며 자라난 나무들 사이로 섬의 모습이 반쯤 가려지고, 나무 밖으로는 바다인지 하늘인지 구별도 안가는 것이 끝없이 남은 여백을 메운다.
내가 이곳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서 바라보면 눈앞에 보이는 영종도를 우리 동네라고 품으로 당겨부르고 싶어져서이다. 바다가 아니라 호숫가 앞에 선 느낌이 들기 때문이고. 호수에는 물이 아니라 눈에 설익은 영종도의 건물들로 차있고, 호수 안은 너무 잔잔해서 출렁이지도 물결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양 팔을 동그랗게 말아 안으면 그 속으로 가지런히 담길 것 같이 아담한 섬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을 보니 다행히 해가 한줄기 남아있었다. 시계가 없어서 시간을 볼 수 없었지만 밤이라고 부르기엔 한참 이른 시각인게 분명했다. 나는 오늘은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던 그 정상을 향해서 힘차게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정상을 따라 죽 이어진 나무 계단을 오르는데 반대편 계단으로 아까 길을 물어봤던 커플이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들은 내가 돌아나온 까치길을 통해 정상에 도착한 듯 싶었다. 내가 갈때는 한바퀴 돌아나오게 된 길이었는데 신기하기만 했다. 꼭대기에 오르자 사람은 나뿐이었다. 해가 지는 곳을 바라보는데, 구름이 많은 날이라 모양을 갖춘 해는 없었다. 대신 가로로 넓게 깔린 잿빛구름 위로 딱 한번 붓칠한 듯한 다홍빛의 석양이 응축되어 있었고, 그 위를 짙은 구름이 한번 더 덮었다. 꼭 하늘이 찢어지기라도 한 것 처럼 튿어진 틈에서만 석양빛이 보이고 양옆으로 붉은 색이 번지질 못했다. 다른 날 봤던 석양은 모두 수채화 같았다면, 오늘은 많은 부분이 절제된 짙은 유화였다. 멍하니 바라보는데 구름낀 바다와 하늘이 자연스럽게 섞여서는 저 멀리 석양빛이 조금 비치는 곳까지가 모두 바다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저 높게까지 확장된 수평선위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연기같은 구름들이 벌어진 붉은 틈 사이로 스르륵 빨려들어갔다. 구름에 가려진 별 볼일 없는 석양마저도 가만히 관찰을 하니 글 한줄로는 묘사가 어려운 독특한 장면이 되었다.
그렇게 혼자 지는 해를 감상하는데 등산객 한 두명이 정상에 올랐다가 금방 내려갔다. 뒤이어 또다른 등산객이 올라와 내 바로 앞에 놓여있는, 지는 해와 가장 가까운 벤치에 무심하게 앉았다. 그리곤 나무 펜스에 턱을 괴고 카메라로 열심히 해가 지는 모습을 찍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도 한참을 바라봤다. 나는 그 사람에게 석양을 감시하는 일을 맡기기로 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