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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돌비 Mar 06. 2022

노을보다 느린 산책

해질녘 백운산 등산기

내가 선택한 길은 내리막이 되더니 산아래 도로로 이어졌다. 갈림길에서 잘못 선택한 것이다. 산이 나를 내보낸 것 같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핸드폰도 전원이 나가서 자칫하면 정말 위험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다음에 한번 더 도전하자. 담담하게 생각했다. 산 안에서는 해가 질 것 같아서 마음이 급했는데 길을 한바탕 잃고 산 밖으로 빠져나오게 되자 아직 지지 않은 해가 느긋하게 내 애를 태웠다. 차라리 확 밤이 온다면 금방 포기할 수 있을텐데. 아쉬움만 길어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집 밖으로 나온 목적이 그저 집 밖을 나오기 위해서였는데 백운산 정상을 못갔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건 마땅한 이유가 아닌 것 같았다. 정상은 다음에 가면 되니까. 일단 해가 질때까지 어디든 걷기로 했다.



그 어디든이란 곳은 집 발코니에서 가끔 바라보던 주택가였다. 오며가며 지나친 곳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발코니에서 산 능선을 따라 바라보면서 주택가 쪽으로 산 진입로가 하나 있겠구나 막연히 생각하곤 했는데, 오늘같이 동네 뒷산에서 길을 잃고 반강제로 하산하는 진출로가 될 줄은 몰랐다. 어둑해지는 하늘엔 어찌나 구름이 고르게 깔렸는지, 짙은 회색빛 어둠을 머금은 너른 구름이 꼭 벨벳처럼 느껴졌다. 구름 사이로 길이 나있는데, 비행기가 가르고 간 흔적같았다. 손바닥으로 구름을 넓게 쓸어내리면 결따라 명암이 앞뒤로 달라져서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주택가의 바닥은 해질녘의 구름과 잘 어울렸다. 연분홍색 시멘트를 깔아놓은 것 같았다. 구름에 분홍빛이 돌기도 전에 연분홍빛으로 이미 물든 바닥을 보고 있자니 어둠이 벌써 땅으로 내려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왼쪽으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백운산의 옆자락이 보였다. 저 앞의 공사판엔 오렌지색 미니 크레인과 은빛 철골을 휘감싼 새파란 그물망이 보였고, 드러난 공터엔 덜자란 연두색 소나무가 보였다. 제 각각의 색감을 연보라빛 하늘이 낭만적으로 섞어놓았고, 남아있던 겨울의 계절감도 전부 지워진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 산책이라고 생각하며 공사판을 피해 좁게 난 길을 따라 걷는데, 며칠 전 새롭게 발견한 백운산 진입로가 돌연 눈앞에 나타났다. 집에서 한참 떨어진 곳인줄 알았는데 허무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산에서 길을 헤매던 중에도 이곳으로 내려와서 새롭게 산을 오를까 잠시 고민했는데, 생각만으로도 몸이 고된 것 같아 금방 포기했는데, 포기하고 걷다보니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분홍빛 시멘트 길은 이미 끊겼는데도 세상은 파스텔톤으로 아름답게 흐려졌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올라갈 수 있을까? 답을 생각하며 머뭇거리는 대신 직접 답을 확인하기로 결정했다.



노을보다 속도가 한참 뒤쳐진 상태여서 그랬는지, 등산로를 따라 길게 깔린 멍석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속도를 내어 뛰기 시작했다. 달려본 건 오랜만이었다. 운서에 와서 첫 한달간은 밤늦게 이거리 저거리를 쏘다니며 열심히도 뛰었던게 생각난다. 그러다가도 익숙한 풍경에 금방 질려버렸고, 정강이를 타고 무릎까지 전해지는 단단한 바닥에 무릎이 아파서 밤잠을 설치곤했다. 그런 핑계 덕분에 한동안 뛰지 않고 지냈는데, 푹신해보이는 굴곡진 흙길을 보자 달리고 싶어졌다. 고작 몇미터 뛴건데도 숨이 가빠왔다. 더 이상 경치를 감상할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숨이 차다못해 목 안에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속도를 줄여 느리게 걷는데도 불구하고 호흡이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힘들다는 것 마저도 즐거웠는데, 이젠 어느 길로 올라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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