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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돌비 Mar 05. 2022

백운산 큐레이터가 하는 일

관람시간 :  일출 - 일몰 / 휴관일 : 없음

백운산이라는 전시관에 자연이 오브제를 배치해 놓은 것을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그루터기 위에 노랗게 마른 솔잎 한가닥을 사선으로 뉘여놓은 것. 그루터기 아래에 민트색 페인트를 휙 묻힌 것처럼 보이는 이끼. 나는 이게 이끼라는 사실을 카메라로 몇분간 확대해서 공들여 들여다보고서야 겨우 납득했다. 작품명만 없을 뿐이지 그 어떤 미술관 보다도 더 감각적인 배치에 감탄하는 순간이 이어졌다.


나는 미술관 전시를 남들만큼 즐기는 편이 아니다. 특히 액자에 담겨있는 회화 작품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때가 많다. 대신에 한번도 가본적 없는 새로운 미술관을 가는 건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건 작품이 걸려있는 전시 공간이다. 예를 들면 창이나 건물의 벽이나 천장같은 것에 몇배로 더 감동한다. 그래서 다시 방문했을때 새로운 전시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감동은 한결 줄어들고, 같은 공간에 작품만 갈려있는 걸 볼때면 모든게 납작하게만 느껴진다. 작가의 인생과 작품에 들인 시간과 감정까지 두꺼운 유리로 막힌 액자에 표구된 것 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백운산이라는 미술관은 전시 작품이 매분, 매초마다 바뀌었다. 전시품의 배치가 바람만 불어도 바뀌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걸 비추는 조명은 단 일초도 같은 곳에 머물지 않는다. 전시실에 딱 하나 있는 태양이라는 할로겐 등은 초마다 각도를 바꿔가며 새로운 작품을 조명한다. 또 백운산이라는 거대한 전시관은 절기를 지나며 무수히 모습을 변화시킨다. 이곳이야 말로 뒷짐지고 진득하게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러번 와도 질리지 않을 유일한 미술관. 그렇게 자연이라는 큐레이터가 우연하게 만들어낸 배치를 하나 하나 발견해가며 오르막을 따라 걷는데, 오른쪽 언덕에 듬성듬성한 나무 여백 사이로 한순간에 해가 쏟아졌다. 내 왼쪽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메마른 겨울 나무들은 빛의 온기를 받자마자 그에 상응할만한 금빛의 생기를 풀어냈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빛에 눈이 시린걸 참아가며 그 모습을 감상했다. 내가 걷던 길에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넘어온 것 같았다. '역시 모든 것을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것은 빛이구나.' 그 단순한 사실이 마음 깊이 느껴졌다.


힘이 다 빠져서는 마른 잎을 커튼처럼 내려놓은 나무에 햇빛이 닿자 잎사귀들은 샹들리에의 크리스탈 장식처럼 풍부하게 빛을 머금었고 빛을 아래로 늘어트려서 입체적인 장막을 만들었다. 나는 보는 것 만으로도 황홀하고 마음이 따뜻해져서 나무 앞으로 걸어가 꽉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내 등에 닿아 만들어질 그림자와 바스러질 가벼운 잎사귀들을 생각하고 잠시 바라만 보다가 빛이 떠나기도 전에 걸음을 옮겼다. 우주 어딘가에서 내리쬐는 빛이 아니라, 옆으로부터 눈앞까지 미끄러지듯 달려오는 햇빛을 지나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드디어 이정표가 세워진 곳이 나왔다. 하도 딴짓을 많이해서 정상까지 오르긴 힘들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백운산까지 2km라는 표시가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이제는 정상으로 가야지 생각하며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걷다보니 익숙한 갈림길이 나왔다. 끌리는 곳으로 걸었는데 이렇다할 증거는 없지만 분명 와본 길 같았다. 산길이란 게 다 그렇지 생각하며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려던 찰나 발 밑에 익숙한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 발견한 파란색의 깃털이었다. 그제서야 왔던 길을 되돌아 왔다는 걸 깨달았다. 큐레이터의 기획의도였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수없이 오르던 백운산에서 그것도 이정표를 눈 앞에 두고 길을 잃고야 말았다.  


어느 쪽으로든 걸어야했다. 그런데 내가 몸을 돌릴때마다 그 방향에서 사람이 올라오거나 내려왔다. 평일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마주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나는 평소처럼 사람들을 피해 걷는 대신 먼저 다가가서는 백운산 정상에 가는 중이세요?하고 물었다. 세 그룹의 사람들에게 물었는데 모두 다른 답을 했다. 첫번째 사람들은 내가 헤맸던 까치길로 들어갔고, 두번째 사람들은 내가 까치길로 들어서기 전까지 올라왔던 계단으로 내려갔다. 마지막 사람은 유일하게 하산중인 등산객이었는데, 이길을 따라서 쭉 걷다가 정자가 나오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라고 말해줬다. 길을 물었을때 온길을 되짚어보는 듯이 잠시 생각을하고 알려준 답변이어서 믿음이 갔다. 나는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 '이길'을 따라서 걸었다. 그런데 정자가 나오기도 전에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것 저것 사진을 찍어내느라 핸드폰 배터리는 이미 나간 탓에 지도를 볼 수도 없었다. 모든 길을 다 가볼 수도 없고 길을 물을 사람도 없었다. 살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지가 아니라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중요한 순간이 있다는 점이다. 해가 더 지기 전에 움직여야 했고 길 하나를 선택해서 무작정 걸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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