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가 흘린 깃털을 따라서
백운산을 한두번 다녀온 뒤로는 평일에는 산에 가지 않게 되었다. 산보다는 동산에 가깝지만, 동네에 사람이 적은 탓인지 가끔가다 산 속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한적한 구간이 나온다. 정말 혼자라면 다행이지만, 어쩔땐 무슨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르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인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홀로 걷다가 인기척이 느껴지면 서로의 인상착의를 저 멀리서부터 유심하게 살펴보게 된다.
3월이 시작되었고, 유난히 짧은 2월 때문에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방안에 차곡차곡 쌓여서는 나를 집밖으로 밀어냈다. 달리 갈곳이 없어서 집 바로 옆으로 이어지는 백운산 등산로로 향했는데, 백운산은 이미 여러번 와봤다는 생각에 별로 흥이나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느릿느릿 걸으며 이미 익숙해진 것들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 시늉을 했다. 처음엔 시늉이었는데, 집중해서 볼수록 생전 처음보는 것들이 눈에 띄였다. 오늘 본 나무는 며칠 전에 본 나무와 어딘가 달랐다. 나뭇잎들이 생전 본적없는 포즈로 매달려있고, 몇주 전에는 정말 없었다고 장담하는 가느다란 넝쿨줄기가 손가락보다도 얇은 나뭇가지에 촘촘하고 엉성하게 감겨있는 것도 발견했다. 얼마전에 머리를 자를때 내 머리가 곱슬인거 아냐고 물었던 미용사의 말에 놀라서 그럴리 없다고 대답했던 것이 떠올랐다. 저는 평생을 직모로 살아왔는데요, 반곱슬이라는 표현까진 용인되지만 곱슬은 아닐텐데. 계절이 지났다고 노랗게 색을 바꾼 넝쿨이 꼬불꼬불 감겨진 곡선에 눈을 떼지 않고 따라갔다. 긴 종이를 손톱사이에 넣어 주욱 당기면 종이 끝이 팽그르르 말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옆에 있던 소나무는 길다란 성냥깨비 같은 이파리들을 모빌처럼 흔들흔들 달고있었다. 모르는 틈에 백운산의 모습이 조금 바뀌어있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진을 찍으려고 장갑을 벗었다 꼈다를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두 짝을 다 모아서 한쪽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가끔은 패딩 주머니가 어디까지 이어진 건지 놀랄때가 있다. 등산로 입구에서만 몇십분을 지체했다. 어쩌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정상까진 못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걸음마다 뭔가 달라진 거 없냐고 묻는 산을 나무 하나, 줄기 하나, 이파리 하나 하나 찬찬히 살펴가며 움직여야했다. 제대로 걷지 않고 자꾸 멈춰서는 내가 의심스러웠던건지 새가 굳이 내 근처로 날아와서는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쪼롱쪼롱 울기 시작했다. 꼬리가 반듯한게 까치같아 보였다. 하지만 울음소리가 까치처럼 까-하고 시작하지 않아서 의아했다. 나는 새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휘파람을 호롱호롱 불었다. 그러자 새는 대답하듯 쪼롱쪼롱 울었고 몇번씩 바람소리가 오고갔다. 내가 휘파람을 멈췄는데도 새는 아랑곳 않고 울었다. 쉼표가 있는자리에 우연히 내가 음을 넣은 것인데 그래놓고 새랑 교감을 한 것 같아서 기뻐했다. 인간은 이렇듯 귀여운 동물의 반응 하나에도 행복해한다. 나 때문에 새의 목이 쉬기라도 할까봐 조금 더 걸었다.
새들이 남긴 빨간 열매 한 알을 공들여 바라봤다. 사진도 찍었는데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아서 경계선이 흐릿하게 무너졌다. 나무에 걸린 빨간 풍선 같았다. 조금 더 천천히 걸었다. 그러자 발밑에서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새의 깃털이었다. 마르고 구멍이 송송난 낙엽들에 사이에 매끈하고 기다란 깃털하나가 거짓말처럼 껴있었다. 쭈구리고 앉아 자세히 들여다 봤다. 어두운 초록빛과 푸른 빛이 반반씩 섞여있는게 산비둘기나 까치의 깃털 같았다. 이렇게 추측하기까지 몇초도 걸리지 않았는데,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새라곤 그 두 종류 뿐이기 때문이었다. 작은 새 한마리가 이렇게 기다란 깃털을 가지고 있다니 신기했다. 새와 함께 휘파람 불던게 고작 몇걸음 전이어서 그런지 떨어진 깃털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게임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어릴적 하던 게임에서 캐릭터를 옆 마을의 산에 보내서 무언가 주워오는 일을 즐겼다. 그렇게 주워온 것들은 물약을 만드는 마법재료이거나, 특급 파르페를 만드는 식재료로 쓰였다. 어린 마음에 별 노력도 없이 자연에서 뭔가를 얻어내는 일들이 얼마나 설레게 느껴졌는지 떠올랐다. 이게 정말 게임이라면, 이 깃털을 줍는 순간 나무 위의 까치들이 날아와 내 어깨에 앉는 상상을 했다. 검은색 롱패딩에 검은색 신발 검은 머리까지. 깃털 하나만 더하면 완벽한 까치룩이었다. 새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신비한 깃털인건 아닐까? 나는 혼자 걷는탓에 멈출 줄 모르고 뻗어나가는 상상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또 다른 상상으로 이어지기 직전에 나는 다른 깃털하나를 더 발견했다.
이건 낙엽의 색과 같았다. 그럼에도 너구리 꼬리같은 줄무늬가 있어서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것만큼은 정말 어느 새인지 알 수 없었다. 산비둘기는 몰라도 까치는 확실하게 아니었다. 좀전에 봤던 종이처럼 납작한 깃털과는 모양이 달랐고, 금방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민들레 솜털같았다. 바람이 살살 불자 하늘을 향해 뻗어올라간 솜털들이 부스스 정전기가 난것처럼 흔들렸다. 꼭 살아있는 것 같아서 깃털이 맞는지 의심했다. 만지면 움츠러드는 살아있는 해삼같기도 했다. 뜨거운 열기에 숨을 쉬듯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가쓰오부시도 생각났다. 나는 그 가벼운 털의 움직임에 마음을 빼앗겨서 한동안 쭈구리고 앉아 바라봤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부끄럽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닭의 털이나 비둘기의 털이나 다를바가 없는데, 온통 식물로 뒤덮힌 곳에서 동물이 흔적을 남기고 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귀한걸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산은 나무의 모음집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던 나에게, 홀로 걷는 백운산은 조금 무섭다고 느꼈던 나에게 산의 구석구석이 이상하리만큼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눈에 익어서 느끼는 친근함이 아니라, 나 말고도 수많은 생명이 이곳에 머물고, 한걸음 더 걸은 이곳에도 머물고, 또 한걸음 걸었을 때 이곳에도 머물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친근함말이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