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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돌비 Apr 26. 2022

장봉리 <만물상회>에만 파는 것

장봉도 트레킹 2화

산속에 들어오자 나무가 만드는 그늘 때문인지 더위가 조금 가셨다. 안에 받쳐 입고 온 긴팔 티셔츠를 팔꿈치가 보이도록 걷었다. 하지만 산속을 뒤덮은 진달래목 때문인지 사방에서 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땀냄새를 풍기는 인간이 들어서자 검열을 하듯 내 몸 가까이를 날아다녔다. 결국 걷었던 소매를 조심스레 내렸다. 한 시간 넘게 바짓단으로 풀을 쓸어가며 했던 다짐은, 다음 등산엔 가벼운 자켓과 캡 모자 그리고 얼음물 없이는 절대 출발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날씬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산

장봉도의 산은 유난히 길이 좁고 경사가 급했다. 또 길은 자디잔 돌과 도토리와 마른 나뭇잎으로 뒤덮였는데, 미끄러지기 딱 좋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내리막엔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아서 미끄럼틀 타듯이 내려가는 게 빠르고 안전해 보였다.


산을 빠져나와 가려던 곳은 한들 해수욕장이다. 여느 섬이 그렇듯 장봉도에도 이름 붙은 해수욕장이 여럿인데, 관광 안내도에 인쇄된 사진에 사람 한 명 없는 한적한 해변이 마음에 들었다. 도착하니 정말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물도 없었다. 게다가 마실 물도 없었다. 내가 산을 헤매는 사이 바다는 간조 때가 되어서 얕은 파도를 밀어내며 뒤로 뒤로 물러가는 중이었다. 그 위로 갈매기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 다녔다. 눈앞에 갯벌을 보자 해변에 가만히 앉아 해를 쬐려던 마음도 빠져나갔다.

건너편 섬까지 걸어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수욕장에 있다던 슈퍼는 문을 열지 않았다. 출발 후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걸어서 갈증이 심했다. 그 와중에 문 닫은 슈퍼를 지키는 강아지 세 마리가 있었다. 흡사 지옥 문지기 견 같았다. 눈앞까지 털을 기른 강아지 세 마리 중 가운데에 목줄을 메고 있는 강아지는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사납게 짖었다. 그 옆으로 목줄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검은 개는 짖는 개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나를 향해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사납게 짖는 개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검은 개


겨우 서너시간 만에 장봉도에서 가보고 싶던 곳을 모두 들리고 나자 목적지가 없어졌다. 이미 7시에 돌아가는 배편을 끊어놓은 터라 빨리 돌아갈 수도 없었다. 혼자서 밥을 먹을만한 마땅한 식당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마을 안에 물을 파는 곳은 있겠지 싶어 해수욕장을 벗어나 장봉리로 향했다.

=.= 너무 목이 말라 메마른 표정

장봉리는 낮은 건물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골목 하나를 돌면 경찰서가 나오고 다음 골목엔 소방서 그다음 골목엔 농협과 수협이 있는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남의 동네인데도 어쩐지 정다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건물마다 편의점이 하나씩 있는 곳에서 살고 있는 나로서는 여태 슈퍼 하나 발견하지 못한 게 믿기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던 중 만물상회라는 멋진 간판을 발견했고 만물까진 필요 없으니 물만이라도 팔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게를 향해 걸어갔다. 조명이 어두워 문을 닫은 곳인가 했는데, 실망하기 직전에 가게 안에 사람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너무 기뻐서 문 앞까지 뛰어갔다.


주유소에서 키우는 성격좋은 개. 기름은 못 지킨다.


시원한 물을 마시자 여행이 새로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다. 더위에 지친 나머지 곧장 선착장으로 돌아가서 먼저 오는 배를 탈 예정이었는데, 마음을 고쳐먹고 조금 더 멀리까지 가보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섬 안쪽에 카페가 하나 있다는데, 그곳에서 배터리를 충전하고 배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고 돌아나올 계획이었다. 카페가 운영을 하는지 안하는지는 도착해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골목을 빠져나와 바다를 끼고 걷는데 빠져나가는 썰물에 슬로우 모션을 건 것 같았다. 바람엔 항구에서 나는 짠내가 실려왔다. 영종도에 살며 쉴 새 없이 바다를 보면서도 마스크 때문인지 바닷물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었는데, 장봉도의 바다에서는 정말 바다 냄새가 났다. 웃기는 얘기지만 어느 정도였냐면 바다 앞에서 음식을 먹을 땐 특별히 간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지도를 켜려던 찰나 창을 활짝 연 낮고 긴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로 기다란 게 장봉도를 닮은 카페였다. 간판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내가 찾아온 곳이었다.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얼음이 커피에 녹아 섞여 들기도 전에 커피를 모두 마셔버렸다.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넓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천장에서 돌아가는 실링팬을 쳐다봤다. 거기서 부는 바람인지 아니면 밖에서 들어오는 바닷바람인지 하루 종일 머금은 얼굴의 열기가 그제서야 차분하게 식어갔다. 붉은빛이 도는 원목 인테리어는 어쩐지 동남아 휴양지의 카페를 떠올리게 했는데, 되돌아보면 장봉도의 여행이 그런 비슷한 정취를 풍겼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지도 없이 한적한 마을을 헤매는 거나 버스 시간을 맞추느라 예기치 않은 곳을 걷게 되는 것까지. 아니면 그냥 여름처럼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따뜻한 나라에서의 여행이 생각난 건지도 모른다.

카페에 앉아서 건너편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하는 걸 확인했다. 시간표를 보니 6시 15분 차와 6시 35분 차가 있었는데, 7시까지 선착장에 가기엔 둘 다 충분해 보였다. 혹시 모르니 6시 15분 차를 타고 미리 도착해서 선착장 근처에서 가만히 바다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다. 여섯 시가 되기 전 카페를 나왔고 버스를 기다리며 그 앞의 바다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칼국수 집이 눈에 들어왔다. 갈증과 더위를 해소하고 나니 그제야 배고픔이 몰려왔다. 카페에서 먹은 크로플 하나가 허기를 달래긴커녕 더위에 마취되어있던 미각을 살려놨다. 나는 고민하다가 메뉴만 구경할 요량으로 가게 앞으로 걸어갔고 방충망을 사이에 두고 메뉴판을 읽다가 1인분도 판매하냐고 물었다. 사장님은 된다고 어서 들어오라고 했고 나는 6시 15분 차 대신에 35분 차를 타고 나가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 계속 -



트레킹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영상으로 확인해보세요!

https://youtu.be/T4buPxuNh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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