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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돌비 Apr 26. 2022

보일러, 기모, 목폴라를 보내며

장봉도 트레킹 1화

화요일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 일요일에 반쯤 핀 벚꽃으로 겨우 봄 분위기를 즐겼는데 만개할 타이밍이 오기도 전에 화, 수, 목 삼일 내내 비가 온다고 하니 벚꽃을 본 사람들도, 아직 벚꽃 구경을 가지 못한 사람들도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매년 벚꽃이 피기 시작할 때쯤이면 너무 이른 타이밍에 비 소식이 이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지난 주말 다섯 시간을 꼬박 걸으며 봄꽃 나들이를 즐겼다. 그런데 너무 즐겨서인지 오히려 주중에 내린다는 비가 반가웠다. 열띤 축제 분위기는 잠시 접어두고 차분하고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월요일 아침 눈을 뜨니 흠잡을 데 없이 따뜻한 해가 떴다. 몇 달째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꼭 지폐 갈리는 소리처럼 들려서 외출할 때나 창문을 열어둘 때 온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살았다. 그런데 날이 별안간 따뜻해지니 창문을 열 때마다 오르내리는 숫자가 거슬려서 난방을 아예 꺼버리기로 했다. 두꺼운 수면양말을 신지 않아도 맨발로 방안을 무리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 날이 이렇다 보니 월요일 하루를 집안에서만 보낼 수가 없었다.

내가 떠난 곳은 장봉도였다. 지난번 신도에 다녀왔을 때 바이크 대여점 아저씨에게 얻어온 지도에 의하면 신도, 시도, 모도 삼형제 섬 바로 옆에는 그걸 다 합친 것보다 큰 크기의 장봉도라는 섬이 있었다. 게다가 장봉도의 관광명소를 소개하는 페이지에는 동네 공원에서 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풍성한 벚꽃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장봉 벚꽃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도로 양쪽으로 하늘을 가리는 하얀 벚꽃이 가득했다. 또한 길쭉한 섬의 모양 따라 마련된 트래킹 코스도 무척 단순해 보였다. 벚꽃이 피었을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트래킹 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나는 배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간단하게 가방을 챙기고 장봉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여행을 시작했다.



삼목 선착장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유별나게 쾌활한 기사분을 만났다. 택시에서 대화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관광지에 가는 사람처럼 태도가 변해서는 장봉도에 가보신 적 있냐며 말을 이어갔다. 기사님은 혼자 여행을 간다는 게 멋진 일이라며 나를 치켜세워주었는데 사실 하기싫은 일을 피해서 되는대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받기에 민망한 칭찬이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주변에서는 멋진 선택이라고 대단하다며 말을 했지만, 난 멋지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삶을 살게 될 거란 걸 알았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도 입안이 썼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속없이 느껴졌던 격려와 부러움을 이젠 모른척 받아들이게 되었다.


배 대합실의 풍경. 새우깡(2,000원) 셀프코너


무사히 선착장에 내려서 장봉도행 표를 끊고 여유롭게 승선을 했다. 단지 두 번째일 뿐인데 저번보다 설렘은 덜했다. 나는 배의 꼭대기에 올라가 바다를 구경하는 대신에 대합실에 들어가서 바다를 등지고 앉아 핸드폰을 충천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지도를 바라보며 대략적인 코스를 짰다. 그런데 계획을 세 개쯤 짜고 난 후에도 배가 출발하지 않았다. 시간이 참 느리게 가는구나 싶어 문 쪽을 바라봤는데, 창밖으로 바다가 음소거된 화면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갑판 위가 너무 고요한 탓에 배가 움직이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제서야 핸드폰 충전은 그만두고 얼른 배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배의 웅웅 거리는 엔진 소리와 그 힘에 파도가 잘게 부서져 갈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신도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배에서 바라본 장봉도 섬자락

신도항에서 한번 멈추고 이십 분을 더 가서 장봉항에 도착했다. 선착장마다 섬의 입구를 알리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장봉도는 벚꽃과 닮은 분홍색이었다. 시작부터 도로를 따라 경사진 오르막이 이어졌고 꼭 가야 할 해변 하나와 벚꽃길을 정해두고 바다를 따라 여유롭게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본 풍경에선 개나리와 진달래가 땅따먹기를 하는 것처럼 번갈아가며 산을 칠했다. 해변에는 돗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이 있었는데, 넓은 챙의 밀짚모자가 해변의 고운 베이지색 모래와 어울렸다. 해변이 아니더라도 섬 어디든 자리만 잡으면 노곤하게 일광욕이 가능한 날씨였다.


눈치 없이 위아래로 기모가 들어간 옷을 입고 온 나는 태양열로 자가발전하는 보일러 같았다. 아니면 한겨울에 틀어놓은 보일러 끄는 법을 까먹은 사람 같았다. 아직도 겨울에 당했던 추위를 잊지 못해서 바람이 부는 곳이나 섬이나 산을 갈 때면 남들보다 배로 따뜻하게 챙겨 입는데, 장봉도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젠 목폴라와 패딩을 보내 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내가 흘리는 땀과는 상관없이 길목  벚나무는 꽃잎을 열기 위해선 더 많은 햇빛이 필요하다며 잔뜩 웅크린 봉오리만 매달고 있었다. 꽃이 없는 벚나무는 뜨거운 태양을 조금도 가려주질 못했다. 나는 더위에 질려서 입고 온 후드를 벗어 허리에 두르고 해안 둘레길 대신 산속 트레킹 코스를 따라 걷기로 했다.

장봉도 설치미술. 4월 더위를 표현하는 의자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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