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도 100일을 기념하며
4월 10일은 2022년이 시작된 지 백일이 되는 날이었다. 새해가 시작되고 나서 꾸준히 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숨 쉬고 살아있는 것만큼은 하루도 빼놓지 않았으니 아주 의미 없는 백일은 아니었지 싶다. 백일을 기념하며 케익에 촛불을 켜는대신 촛불을 닮은 목련을 보러 갈 참이었다. 주초에 세평숲에 다녀왔는데, 아직 피지 않은 목련 봉오리는 나뭇가지마다 하얀 촛불은 켠 것처럼 보였다. 그날은 의외로 바람이 차가워서 공원 끝까지 걷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 나오고 말았는데 숲의 끝에 백련산이 있다는 이정표를 보았기에 목련이 피었는지 확인하고, 백련산까지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이번만큼은 추위 때문에 산책을 그만두는 일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가진 옷 중 가장 따뜻한 것을 챙겨 입었다. 롱패딩으로 무장하고 집 밖을 나서는데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차림새가 나와는 다르게 무척 가벼웠다. 반팔만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그 사람들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그 사람들은 아직도 롱패딩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나를 보고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언제 이렇게 드레스코드가 바뀐 건진 모르겠으나 날씨의 변덕과는 상관없이 이불 밖이 춥게만 느껴졌다.
운서역 방향으로 향하던 중 저 멀리서 옥외간판을 가릴 정도로 불그스름한 분홍빛 나무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근처로 소풍을 나온 듯한 사람들이 하나 둘 무리 지어 걷고 있었다. 그 장면이 왜 이렇게 낯선지 생각해보니 코로나가 시작되고 나서 몇 년 동안 제대로 벚꽃을 즐긴 적이 없었다. 봄만 되면 여기저기 출입을 통제한다는 소식뿐이었다. 나는 세평숲을 가려던 계획을 잠시 미뤄두고 벚꽃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 길은 겨울에 올라본 적이 있는데 오르막길 끝에는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들판이 있어 마음이 고요해지는 곳이다. 들판에 다다르니 몇몇 가족이 돗자리를 펴고 한가로이 피크닉을 즐기는 중이었다. 텅 비어 있던 때도 좋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장면이 조금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반전은 오르막 길의 가로수뿐만 아니라 들판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나무들이 전부 분홍 꽃을 피우는 벚나무였다는 사실이다. 몇 달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한 풍경이었다. 나무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깨끗하고 힘 있는 꽃이 풍성하게 자랐고, 바닥에 떨어진 꽃잎은 아직 없었다. 한 커플은 연청색 남방을 맞춰 입었는데, 그 색이 분홍빛 벚꽃 나무와 부드럽게 어울렸다. 그쯤 되니 목련은 금방 잊혔고 나도 어딘가 자리 잡고 앉아 느긋하게 벚꽃을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들판 저 안쪽에 겨울 내내 막혀있던 산길이 새초롬하게 정리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등산로라기엔 이정표도 없고, 한동안은 잘린 통나무가 길목을 가로막고 있어서 들어가기가 겁났던 곳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하게 길이 손질되어 있었다. 어디로 이어지는 산인지도 모르지만 OPEN 간판을 걸고 나를 초대하는 것 같아 한번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산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건 좌우대칭이 완벽한 보랏빛 제비꽃이었다. 걷다 보면 알게 되는 것도 있었다. 온통 부드러운 털로 뒤덮인 꽃봉오리가 있었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겉면을 만져보며 어떤 꽃이 피는 걸까 궁금해했다. 꽃 이름이야 색과 피는 시기만 가지고도 쉽게 찾아낼 수 있는데, 봉오리만 가지고는 검색해 볼 수 도 없었다. 그런데 조금 더 걷던 중 같은 봉오리가 달린 나무에서 노란 꽃이 피어있는 걸 보게 되었다. 그건 내가 올해 들어 이름을 제대로 익힌 산수유 꽃이었다*. 미스매치에 놀랐는데, 커다란 꽃 봉오리와는 다르게 꽃은 돋보기를 들고 봐야 할 만큼 작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봉오리 하나 당 꽃 한 송이가 필 거라는 예상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나는 산수유에 대해서 하나 더 알아간 것 같아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걸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며 알게 된 사실은 산수유와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거의 똑같이 생겼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구분하는 방식은 봉오리의 모양을 확인하는 건데, 산수유는 동그란 반면 생강나무는 촛불처럼 뾰족하다. 백련산에서 반가워하던 꽃은 산수유가 아니고 생강나무 꽃이었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작은 정자가 하나 마련되어 있었고 백운산에 비하면 절반도 안될 만큼 낮은 산인 듯했다. 정상에서 전경을 감상하려는데 반대편에서 시끌벅적한 소리를 내며 등산객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등산객이 하는 말이 재밌었다.
“여기 백년산 정상에 올랐으니 앞으로 백 년, 백 살까지 살 수 있는 거야.”
그러자 다른 등산객이
“나는 어제도 여기 왔으니까 이백 살까지 사는 거지?”
하고 받아쳤다.
아저씨들의 허무개그에 괜히 힘이 빠졌지만, 백일을 기념해 올라온 백련산에서 백 년을 기약하는 건 꽤 의미 있는 일 같았다. 백일 동안 한 거라곤 먹고 자고 살아 숨 쉬는 일이었는데, 그걸 무탈하게 백 년이나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