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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돌비 Mar 30. 2022

전구 장사를 한다면

초봄의 크리스마스


얼마 전 지인과 바닷가를 드라이브하며, 영종도에서는 차라리 전구 장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바닷가 주변의 가게들이 장르를 불문하고 유난히 낭만적인 노란 줄 전구를 휘감아 놓은 것을 보고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다. 전선에 줄지어 달린 전구들은 가로등이나 백열등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게, 존재의 이유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비슷한 색온도를 낸다고 하더라도 줄 하나에 나란히 나란히 손을 잡고 이어져있는 전구는 필연적으로 낭만적인 축제의 분위기를 풍긴다.



씨사이드 파크에 자전거를 빌리러 가던 날, 결국 나는 자전거 대여점까지 걷지 못하고 중간에 이어진 송산 산책로를 따라 걷게 되었다. 송산은 내가 백운산 다음으로 올라가 보려고 항상 눈여겨보던 곳인데, 집과는 거리가 멀어서 언제 한번 날을 잡고 와야겠다고 다짐만 하던 산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내가 걷던 공원에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나있길래 슬쩍 방향을 바꿔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정상까지 몇 분이나 걸리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여유로운 걸음으로 느긋하게 진입로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별안간 연분홍 빛 봉오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처음 보는 색을 발견하고는 빠져들듯이 분홍빛을 향해 걸어갔다. 하나가 아니었다. 분홍빛의 통통한 알전구처럼 여러 개의 봉오리가 둥실둥실 잔가지에 달려있었다. 아직은 투명한 꽃잎에 힘이 없어 보였지만, 이미 몇 겹은 세상 밖으로 펼쳐서 제법 꽃처럼 나풀거리고 있었다.



겨울이 얼마나 길었는지. 나는 살면서 꽃을 처음 본 사람처럼 감탄하며 들여다봤다. 꽃 사진을 찍겠다고 로프너머로 몸을 빼고 있자 지나가던 등산객들은 나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는 머쓱해져서 ‘벌써 꽃이 폈네요.’하고 말을 건넸고 중년의 부부 중 남편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꽃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꽃은 등산로 밖에 펴있는 바람에 지나치기도 쉬웠고, 발견하더라도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아저씨는 나보다 더 과감하게 언덕에 발을 디디고서는 사진 몇 장을 찍어갔다. 내려가며 부인에게 누구누구에게 사진을 보내야겠다고 들떠서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딸의 이름 같았다. 나 역시 제일 잘 나온 사진을 한 장 골라 가족 채팅방에 전송했다. 남들보다 먼저 꽃을 봤다는 걸 자랑하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아끼는 걸 선물하려는 마음이었다. 받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떨림도 있었다.


‘와 벌써 진달래가 폈네?’

가장 먼저 꽃의 이름을 알려준 건 엄마였다. 그제야 나는 확신을 얻어서 ‘이게 진달래예요?’ 하고 되물었다. 이맘때쯤 산에서 볼 수 있는 분홍빛 꽃이라고 해봐야 진달래이거나 물 빠진 철쭉뿐인데도 꽃 봉오리만 보고는 이름을 댈 자신이 없었다. 진달래. 나는 특별해진 꽃의 이름을 몇 번씩 곱씹어보면서 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처음부터 반듯한 계단에 속아 서두르지 않은 탓에 진달래를 발견했으니, 더더욱 속도를 늦춰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서 본 진달래 봉오리를 시작으로 산 전체가 크리스마스 축제 분위기를 띠었다. 아직 활짝핀 꽃은 없었지만 나뭇가지 마디마다 동그랗게 봉오리가 봉긋 올라왔고, 연두색이나 빨간색과 같은 새로운 색감을 진하게 머금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꼭 깜박이는 기능이 고장 난 꼬마전구 같았다. 몇 주만 지나면 산 전체를 두른 작은 꼬마전구가 폭죽처럼 팡팡 터지며 꽃이 되어서 봄을 환영하는 축제를 시작할 것이다.



한편으론 겨울이 다 끝난 마당에 뒤늦게 털 옷을 입는 것도 있었다. 나무줄기 중간마다 돋아난 풀이었는데, 겨울 외투에 달린 털 소매 같기도 하고, 지난해 유행했던 스크런치(곱창밴드) 같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 뒤늦게 구매한 털 달린 크록스 신발이 떠올랐다. 복슬복슬한 것의 정체가 뭔가 들여다보니 두꺼운 나무줄기를 뚫고 잔 가지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터를 잡아놓은 것이었다. 마치 새가 둥지를 트는 것처럼, 침엽수의 가느다란 입사귀로 푹신푹신한 터를 잡고는 천천히 한 마디씩 밖으로 자라는 중이었다. 내 손바닥보다도 작은 줄기가 시간이 지나면 양팔을 벌린 것보다도 한참 더 길게 자란다는 게 믿기진 않았지만, 자연은 항상 믿기지 않는 일을 시간만 주면 해낸다는 걸 이미 여러 차례 확인한 뒤라 그리 놀라진 않았다.



조용히 걷다가 땅바닥에서 맨들 거리는 열매를 발견했다. 색이 꼭 땅콩 같았는데, 생땅콩은 아니고 뜨거운 불에 볶거나 카라멜라이징 한 색이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걸까? 고개를 들어서 나무를 바라봤지만 나무에는 빈손의 잔가지뿐이었다. 아무래도 등산객 주머니에서 떨어진 견과류인가 보다... 그런데 더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자 바닥이 온통 엄지 손가락만큼 굵은 땅콩 천지였다. 사람이 흘릴 양이 아니었다. 나는 범위를 넓혀서 주변 나무를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하늘에 가지를 친 큰 나무가 아니라 눈앞까지 자란 키 작은 나무에 도토리가 매달려있는 것이다. 모자를 쓴 도토리의 모습은 종이 과자에 인쇄된 숨은 그림 찾기에서 본모습 그대로였다. 종이배, 연필, 지팡이 말고도 도토리는 숨은 그림 찾기의 단골 메뉴였다. 항상 모자를 쓴 도토리는 쉽게 찾아냈는데, 이날 모자를 벗고 알맹이만 남은 도토리는 숨지도 않았건만 눈앞에 두고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도토리 구경을 마치고 나자 금방 정상에 도착했다. 높이는 모르겠으나 삼십 분이면 넉넉하게 오를 수 있는 낮은 산인 듯했다. 정상에 마련된 전망대 역할을 하는 정자에 오르면 씨사이드 파크에서 보던 바다를 한결 수월하게 내려다볼 수 있었다. 나는 정상에 온 기념으로 사진을 한 장 찍으려는데 진분홍색 등산복을 입은 등산객이 계속해서 앵글에 잡혔다. 평소 같았으면 완벽한 사진을 찍겠다며 사람이 앵글에서 나가기를 기다렸겠지만, 진분홍색 등산복에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진달래가 자꾸 생각나는 바람에 앵글에서 걷어내지 않고 사진을 남겼다.


짧은 등산을 마치고 오던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갔는데, 물 빠진 바다였던 곳은 출렁이는 파도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둑에 잠시 걸터앉아서 바다가 돌아오는 걸 가만히 바라봤다. 음악을 들으며 그 광경을 보는데 어디선가 휘릭하고 호루라기를 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어폰에서 나는 소리인가 의아했는데 손에 든 검은 핸드폰 화면에 반사된 하늘을 보고서야 새떼가 떠나며 내는 울음소리임을 알았다. 황급히 촬영 버튼을 눌렀으나 그 몇 초 사이에 새는 저 멀리로 떠났다. 철새들은 씨사이드 파크를 아주 떠나는 건가? 아니면 오늘만 잠잘 곳을 찾아 머물다가 다시 돌아오려나? 아쉬움과 궁금증이 섞인 와중에 두 번째 호루라기 소리가 나더니 또 다른 철새 무리가 저 하늘로 날아갔다. 새들은 반듯하게 브이자 모양으로 날아가는 줄만 알았는데, 내가 본 철새들은 꼭 파도를 닮은 모양을 하고는 물결처럼 출렁이며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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