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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돌비 Mar 26. 2022

모르는 사람이 사진을 부탁했다

한강 공원에는 없는 것

일요일엔 날씨가 좋았다. 얼마나 좋았냐면 한 평도 안 되는 베란다에다 방 안에서 쓰던 테이블과 의자를 홀랑 내어놓을 정도로 좋았다. 거기 앉아서 여유롭게 글을 읽으려고 했는데, 흰 종이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셔서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다. 종이 위에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가며 글씨를 읽다 보니 베란다에서 하루를 보내기엔 날씨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동네 공원에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절기에 휴식에 들어간 자전거 대여소가 날이 풀리면서 재개한다는 소식이었다. 영종도에는 따릉이처럼 공공 자전거 대여 서비스는 물론이고 개인이 운영하는 대여점도 드물어서 아쉬웠던 참이었는데, 드디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것이다. 약간 들뜬 마음으로 자전거 대여소가 있다는 씨사이드 파크로 향했다. 신나는 걸음으로 걸어가는 중에 수십대의 자전거와 마주쳤다. 영종도 사람들은 다들 자전거 한대쯤은 필수로 보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울 내내 빛을 보지 못했을 각양각색의 자전거를 구경하며 내가 가는 대여점에는 어떤 종류의 자전거가 있을지 상상했다. 라탄 바구니가 달린 베이지색 자전거일까 아니면 손잡이랑 휠이 유난히 울퉁불퉁하게 생긴 흙 묻은 로드 자전거일까? 나는 집부터 공원까지 한 시간가량을 꼬박 걷고 나서야, 씨사이드 파크는 생각보다 넓다는 걸 깨달았다. 자전거 대여점은 공원의 시작점이 아닌 끝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못해도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했는데, 자전거를 빌리러 가다가 진이 다 빠질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도착하자마자 자전거를 빌려서 집까지 타고 돌아가고 싶었다. 왜 자전거를 빌릴 때 신분증을 맡겨야 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어쨌거나 날씨가 좋으니 대여점이 있는 곳까지 일단 걷기로 했다. 씨사이드 파크라는 이름에 걸맞게 오른쪽에 긴 바다를 두고 걷고 있는데 자전거와 바다와 사람이 한 프레임에 나오도록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일행의 사진을 찍어주는 중이었는데, 사연은 모르겠지만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마 이렇게 화창한 날 동행과 함께 라이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한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그 근방을 지나가자 불쑥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서로의 모습을 찍는 걸로는 부족하고, 두 사람이 같이 나온 모습을 누군가 찍어주길 원했던 거였다.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이런저런 각도로 열심히 찍어주었다. 혼자 여행할 때면 길가던 사람들에게 사진을 종종 부탁하곤 했는데, 수고로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모르는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던 친절함 덕분에 혼자 하는 여행의 날씨가 바뀐 적이 많았다. 연신 고맙다고 말하며 핸드폰을 받아가는 아저씨에게 저도 한 장 부탁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아저씨는 나보다 더 흔쾌하게 그러겠다고 했다. 사실 부탁하고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멋진 사진을 남기려는 마음보단 여기에 오늘 방문했다는 기록의 의미가 더 컸던 것 같다. 나는 핸드폰을 든 아저씨가 내 무음 카메라 때문에 헤맬까 봐 걱정이 되어서 큰 소리로 ‘찍을 때 소리가 안 나요’ 하고 말씀을 드렸는데, 아저씨는 그런 건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네, 찍히는 게 보입니다.’하고 웃으며 답했다. 보통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찍히고 있는 겁니까?’하고 묻는데 아저씨는 달랐다. 어쩌면 멋진 사진이 나올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감사하다며 핸드폰을 받아 들고 주머니에 쏙 넣었다. 궁금했지만 공원 산책이 끝나고 나면 사진첩 속에 담긴 선물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공원을 걷는데 재밌는 풍경이 많았다. 걸어가듯이 자전거를 나란히 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강 공원에서처럼 ‘지나갈게요’하는 날 선 소리를 경계하며 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수상한 사람도 있었다. 풀을 캐는 사람이었는데, 나물 레이더를 사용하는 건지 내 눈에는 잡초처럼 보이는 것들을 검은 봉지에 소중히 담아갔다. 몇 년이 지나서 낯짝이 조금 더 두꺼워지면 무슨 풀을 캐는 거냐고 따라가 물을 것 같다. 풀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데치고 무쳐서 입 속으로 들어갈 운명인 건 분명했다. 산책하는 고양이도 있었다. 고양이가 산책을 하는 것도 신기한데, 리드 줄을 스스로 끌면서 걷고 있었다. 바닥에는 사람 손에 들려졌어야 할 손잡이가 끌리면서 드륵드륵 소리가 났다. 그 앞으로는 고양이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유모차를 살살 밀면서 걷다가 드륵드륵 끌리는 소리가 멈추면, 뒤를 돌아보며 나비야~ 하고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럼 고양이는 하수구를 들여다보는 딴짓을 멈추고 주인에게로 총총 걸어갔다.



이미 어른이 된 자식과 나이 든 엄마가 함께 미니카를 조종하는 모습도 봤다. 미니카는 레이싱카가 아니라 하얀색 봉고트럭이라 예상 밖이었다. 실린 짐도 없는데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트럭은 하얀 강아지처럼 졸졸거리며 주인보다 몇 걸음만 앞서갔다. 농구코트에는 젊은 아빠들이 허리를 숙여가며 자식들이 굴려놓은 공을 여기저기 주으러 다녔다.


물 빠진 바다에 내려가서 굴을 캐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치통 같은 곳에 가득 채운 굴을 가지고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들어 가격을 흥정하고, 흥정하는 걸 구경했다. 물 빠진 바다에 볼거리라곤 없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는 바다에 물이 빠지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몸을 바짝 붙여서 둑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 멀리 뻘에서 돌아오는 상인들이 보였다. 밀물 때가 된 건지 둑 아래 자리 잡은 상인들은 빨간 바구니와 플라스틱 통을 주섬주섬 챙겨가며 장을 정리했다.



한가롭거나 분주한 별거 없는 모습들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눈으로 본 사람들의 한 순간을 모두에게 한 장씩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똑같은 속도로 굴러가는 자전거 두대, 멈춰서 하수구를 들여다보는 고양이, 굴을 사려는 사람들의 뒷모습, 굴 사는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농구공 줍는 아빠를 바라보는 꼬맹이. 유난히 날씨가 화창했기 때문이겠지만, 사진을 찍어달라던 아저씨의 마음이 조금 더 이해가 되었다. 아마 그 아저씨도 다른 사람들의 별거 없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동행과의 평범한 주말을 한 장면에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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