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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돌비 Sep 27. 2022

한 명의 친구

영종도에서 잠수를 시작했던 타이밍


    어쩌면 나는 딱 한 명의 친구만을 사귈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가장 오래된 친구는 대학교 때 만났다. 친구는 오랜 시간 고시생으로 시험을 준비했다. 그동안 나는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고 퇴사를 했다. 그리고 친구는 마지막 시험을 치렀다. 나 역시 이번이 마지막이 되길 바라며 쌓인 업을 치우듯이 글을 썼다.  


    어렴풋이 우리의 시간이 맞아 들어갈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고,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시험을 마친 친구에게서 긴 침묵을 깨고 먼저 연락이 왔다. 나는 공모전에 내기 위한 장편소설을 겨우 마무리 한 직후라 더 이상 글 쓰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우리는 최선은 다할 것을 잃은 상태로 만나서 다시 대학생이 된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이미 앞자리가 바뀌어버린 서로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 찰나가 지나고 마침내 친구는 시험에 합격했다. 누구보다 진심으로 기뻐했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가야 할 길이 너무 많이 남아 주저앉아 있다는 이야기를,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다고, 목적지가 아니라 뒤돌아 출발지로 향하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종도에 이사를 오고 나서 친구에게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사실은 가족에게 조차 말하지 않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 중 놀러 오겠다는 빈말도 하지 않을 사람이나, 오겠다는 말에 가차 없이 거절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쉽게 말했으나, 가까운 사람에게는 그러질 못했다. 여긴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조용한 동굴이 되어야 했고, 그러다가 백일이 지나고 동굴 밖을 나섰을 때 실패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 나가야 했다. 그래야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 마늘과 쑥만 먹은 건 아니었지만, 깐 마늘을 가지고 모든 요리에 원 없이 넣어먹긴 했다.


    한번 세상에서 벗어나자 시시콜콜하게 오는 연락들은 깜깜함 속으로 침전하는 내 세상에 눈이 부시다 못해 시리고 날카로운 빛이 되어 꽂혔다. 나는 성의 없는 답장에 상대방이 지치기를 기다렸고, 오히려 내 인내심이 먼저 바닥나자 당분간 바쁠 것 같다며 ‘내가 먼저 연락할게’ 하고는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중한 것들을 녹이 슬지 않는 어딘가에 넣어두어야 했다. 출발점으로 돌아가려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가 얻은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야 했는데, 원 위치로 돌려두기엔 너무 소중한 것들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살기 시작했다. 그 뒤틀린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은 강제로 균형을 되잡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몇 달간 미뤄온 커피 바리스타 자격 학원에 등록했다. 나라에서 수강료를 내주는 국비지원 수업이었는데, 시작하려 할 때마다 중요한 일들이 생겼다. 예를 들면 겨우 잡힌 인터뷰를 준비한다던가 다음 주까지 끝마쳐야 할 인강이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커피 학원은 실상 내 생계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고 그저 취미를 위한 거였다. 물론 국가에 제출한 계획표에는 ‘커피 브랜드에 취직하기 위한 실무 지식 습득’이라고 거창하게 써놨다. 취업지원제도 상담사에 의하면 나라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으려면 그렇게 써야 한다고 했다. 상담사와는 갈등이 많았다. 나와의 일정을 잊었고, 잘못된 날짜를 기입하길래 내가 실수를 조심스레 정정해주자 자신이 틀렸을 리 없다는 듯이 화를 냈다. 나는 내 선택에 의해 잠시 직업이 없는 것뿐인데 상담사는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나를 온전한 인간 한 명으로 보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중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가장 사소한 일이다. 예를 들면 혀를 차며 ‘글씨 좀 예쁘게 쓰지’라는 말. 종이에 글을 써본 지가 오래되어 손이 굳은 것뿐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내가 초라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원치 않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다니던 회사가 생각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취업지원 상담을 받고 온 날이면 취업을 해야겠단 생각이 싹 가셨고, 토할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좌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을 무시하느라 머리를 앞 좌석 등받이에 꾹 누른 채로 이동해야 했다. 영종도에서 인천까지 2시간에 걸쳐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니면 출근을 하지 않고 나서 눈에 띄게 멀미가 심해진 것도 같다. 이유야 어떻든 앞으로 커피 학원에 다니려면 매번 버스를 타야 하는데, 멀미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처음부터 다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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