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인간이 되어야지
커피는 따뜻한 곳에서 자란다. 온도도 강우량도 습도도 모두 적당한 곳에서만 자라는데, 커피가 자라는 곳을 지도에서 골라내면 적도를 기준으로 긴 띠를 이루고 있다. 이걸 커피 벨트라고 부른다. 적도의 열기를 커피가 어떻게 견뎌내냐 하면 1000m가 넘는 선선한 고지대에 자리를 잡는다. 특히 고도가 높은 곳에서 풍부한 햇빛을 받으며 천천히 자랄수록 밀도가 높아 단단해지고, 향과 풍미는 더 풍부해져 맛 좋은 커피가 된다고 한다. 맛 좋은 커피를 가려내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생산 고도로 커피의 등급을 분류하는 방식이 있을 정도다. 예를 들면 1600m 이상에서 자란 1등급 콩은 SHG(Strictly High Grown)라고 불린다.
생각해보면 일조량이 높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선선한 기후는 커피 말고 인간에게도 좋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영종도에 이사를 온 이유도 다르지 않다. 단기 계약이 가능한 25층짜리 방이 부동산 어플에 올라왔는데, 한창 층간소음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25층짜리 건물의 맨 꼭대기 층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가 들어가야 하는 집이란 확신이 들었다. 물론 다른 방에 비해 십만 원가량 비싼 월세 때문에 확신이 흔들리긴 했다. 부동산에 연락을 해보니 단기는 맞지만 6개월부터 계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딱 4개월만 머물고 싶었는데, 왜냐하면 해가 바뀌고 봄이 오는 시기쯤에는 취직을 하든 사업을 하든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았다. (여름도 떠나가고 가을을 지나고 있으니 엄청난 착각이었다.) 그러면 영종도에 적을 두고 있는 건 여러모로 성가신 일이 될 게 뻔했다. 하지만 부동산에서는 4개월은 안된다는 말만 했고 하는 수 없이 마음을 접고 다른 방을 보면서 몇 주를 기다렸다. 여전히 방은 나가지 않았고 그쯤 직접 부동산에 찾아갔다. 나는 6개월 계약조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일단 집주인한테 계약 의사를 물어보라고 부탁했다. 어쩐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4개월도 괜찮다는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고, 나는 바로 다음날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영종도에 입주했다.
입주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내 집은 아니었다. 오피스텔이지만 10층 위로는 호텔로 쓰이고 있어서 엄밀히 따지자면 생활 숙박시설에 해당되기 때문에 전입신고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마 방법은 있을 테지만, 부동산에서 전입신고가 필요하냐며 날카롭게 묻는 걸로 봐서는 그렇게 한다면 월세가 또 오를게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이미 한 달 치 월세와 맞먹는 금액을 부동산 중계비로 털리고 난 이후였다. 돈 빠지는 속도가 아찔했다. 생활 숙박시설은 일반 오피스텔보다 중계비가 비싸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최대 수수료율 모두 받아낸 부동산에 속이 쓰려서 이삿날 오피스텔까지 캐리어를 끌어야 하는데 한번 태워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25층 방을 계약한 또 다른 이유는 산이 보이는 방향으로 난 발코니 때문이었다. 발코니와 테라스와 베란다의 정확한 차이를 모르지만, 무릇 베란다라면 안 쓰는 짐을 쌓아두고 그 옆에서는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방 밖에 있는 건 테이블 하나 꺼내도기에도 벅차게 느껴지는 좁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바닥에 깔린 인조잔디와 그 위에 푸짐하게 늘어져있는 빈백으로 보아 가만히 앉아서 경치를 감상하기엔 충분해 보였다. 인조잔디와 빈백으로 시작된 인테리어는 한 때 이 방이 에어비앤비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흰 벽에는 모네 포스터와 몇 해 전부터 저작권이 풀려서인지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는 마티즈 엽서들로 꾸며져 있었다. 테이블을 덮은 체크무늬 방수천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화병에는 망고 튤립 한 송이가 꽂혀있었고 물론 조화였다. 나는 지나치게 감성적인 이 방에서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주머니 사정을 생각한다면 최대한 신경을 끈 채로 남의 집이다 생각하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천장 위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4개월 동안 부지런히 살아갈 궁리를 마치고 더 단단한 인간이 되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엔 적당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