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적신 원두, 무한 번 적신 갯벌
강의실의 문을 열자 얼핏 봐도 열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빈자리에 앉으세요’라는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비어있는 곳이라곤 없었다. 찰나였지만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나는 눈앞에 있는 의자를 서둘러 당겼다. 그제서야 누군가 책상에 올려둔 자신의 짐을 치웠다.
커피 학원은 노란 조명에 따뜻한 커피 향이 감싸는 낭만적인 곳은 아니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커피색 앞치마가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커피 얼룩이 묻어도 티가 나지 않을 얼룩덜룩한 빈티지 판자 무늬 책상과 가방을 걸면 뒤로 넘어가는 가벼운 플라스틱 의자가 있었다. 책상 얼룩이 의심스러워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그리고 물티슈를 찾아 일어서자마자 꽈당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따 쉬는 시간에 커피 한잔씩 내려드릴게요’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멀미와 갈증에 빙글빙글 돌던 마음이 점차 진정되었다. 약속된 커피 한잔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새 학기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첫 실습으로 드립 커피를 내렸다. 원두를 뜨거운 물에 담뿍 적시고 그다음엔 달팽이 모양으로 주전자를 돌려가며 골고루 물을 뿌린다. 물은 세 번에 나눠서 따르는데, 차오른 물이 빠지는걸 넋 놓고 바라보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물이 다 내려가기 전에 다음 물을 부어야 한다며 주의를 줬다. 나는 물이 빠지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을 걷어내고 다시 한번 필터 위로 물이 차오르도록 원을 그렸다.
지금 생각하니 물이 빠지길 기다린 건 흙에 물을 주던 습관 때문이다. 바싹 마른 흙 위로 물을 주면 정말 물을 삼키는 것처럼 꿀꺽하는 소리를 내며 물을 빨아들였다. 그게 내가 겪은 일 중 드립 커피를 내리는 것과 가장 유사하 경험이다. 여태껏 그 많은 양의 커피를 마시며 살아왔지만 정작 내 손으로 내려본 적은 없었다. 남이 내려주는 커피 그리고 기계가 만들어주는 캡슐커피가 더 익숙했다. 물론 일회용 드립백을 써본 적이 있으나, 그건 항상 힘없이 텀블러 속으로 풍덩 빠져버리거나, 제대로 우려지지 않아서 맹물 같은 맛이 났다. 커피라고 부르긴 어려웠다. 어릴 적 집에는 자동으로 커피를 내려주는 낡은 드립머신이 있었지만, 그건 내가 아주 어려서 왜 커피를 마시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던 때였다. 지금은 커피라도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지만 말이다.
긴 기다림 끝에 내가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셔봤다. 특별히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두 번째 내린 커피를 마셔보고 나서야 첫 번째 커피의 맛이 꽤 좋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두 번째 내린 커피는 너무 밍밍했다. 최대한 섬세하게 물을 주려고 했으나, 필터 아래로 처마에 비가 새는 것처럼 두꺼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종이컵 두 개를 양손으로 들고 홀짝이며 첫 번째 커피와 두 번째 커피를 비교했다. 스스로 피드백을 주고 있는데 옆자리 사람이 자신이 내린 커피를 마셔보겠냐고 물었다. 새 종이컵 두 개를 들고 와서는 나와 내 앞자리 사람에게 조금씩 내린 커피를 따라주었다. 다른 테이블에서도 서로가 내린 커피를 나눴다. 그러는 중 강의실 앞에 놓인 종이컵의 높이가 가파르게 줄었다. 쌓인 종이컵의 볼록한 림을 손가락으로 훑는 감각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매끈한 곡선이 진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수를 세는 느낌. 사람들과 둘러앉아 개수에 맞게 종이컵을 펼쳐놓고, 무거운 페트병에 담긴 음료수에 가벼운 종이컵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바닥의 중앙에 맞게 음료를 따르는 기억. 사람들과 그런 모임을 가져본 게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한번 세어보려다 말았다. 그 사이 옆사람은 커피를 나눴고 나는 나눠준 종이컵을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마셨다.
커피가 입안에 닿자마자 순간적으로 인상을 썼다. 내가 내린 커피와는 비교도 안 되는 쓴맛이 났다. 나는 한 모금을 마지막으로 바로 컵을 내려놨고, 기대하는 듯이 바라보는 옆사람의 얼굴에 예의상 돌려줘야 할 맛 평가를 생략하고 말았다. 예전 같으면 독특하다거나 맛이 진하다는 말로 사실을 가다듬어 돌려줬을 텐데 나는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처음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셨다. 이미 식어버려서 처음 먹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수업을 마치고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에게 ‘다음 주에 뵐게요’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 다음 주 말고 내일모레에 만나자며 정정해주었다. 제일 먼저 교실을 빠져나왔으나, 교재를 두고 가려고 다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도 교재를 어디다 두고 가는 건지 몰라서 다른 수강생과 대화를 나누는 선생님을 기다렸다가 물어보고 나서야 교실 바로 뒤쪽에 있는 선반을 알아차렸다. 거긴 한눈에 봐도 이미 무덤처럼 수많은 교재들이 쌓여있었다.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면서 오늘 일어난 자잘한 실수들을 빠르게 잊으려고 애써야 했다. 대신 좋은 기억들을 떠올리기로 했다. 예를 들면 교재에 이름을 쓰려는데, 옆자리 사람이 챙겨 온 필통에 수성 싸인펜이 있어서 책 옆면을 얇은 볼펜으로 갉아먹지 않고도 수월하게 이름을 쓸 수 있었다는 것. 앞자리 사람도 그 수성 싸인펜을 빌려 이름을 썼다. 꼭 새 학기가 시작된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갈 땐 버스 대신 걸어가는 걸 택했다. 이번엔 돈 때문이 아니라 건강 때문이었다. 부쩍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 처음 영종도에 이사를 왔을 때 가장 좋았던 것은 새로운 거리를 산책하는 일이었다. 오래 살던 곳에선 어디를 가도 이미 수 백 번씩은 걸어본 거리었다. 아무리 멀리 걸어도 어느 쪽으로 길이 이어지는지 알 수 있었고, 처음 가보는 곳도 실상은 처음 가 본 곳이 아니었다. 어디든 버스를 타고, 차를 타고, 자전거를 타고 여러 번 지나던 길목뿐이었다. 그러다가 영종도라는 섬에 이사를 왔는데 모든 게 새로웠다. 듣고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정류장 이름. 지도를 보고 걷는데도 모든 길이 예상치 못한 각도로 꺾여있는 듯했다. 게다가 단순한 지형도 마음에 들었다. 마음 놓고 헤맬 수 있도록 선택지를 줄인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복잡한 건물도 없고, 마음만 먹으면 산 하나를 놓고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재밌었다. 예전에 살던 곳에선 퇴근길에 떠있는 달 하나를 보며 감탄해야 했는데, 운서에 이사를 오고 나서는 대낮부터 나란하게 따라오는 산을 보며 걷는 습관이 생겼다. 하늘을 보려고 고개를 꺾는 일도 줄었다. 하늘은 항상 눈앞에 있었다.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걸어서 꼬박 한 시간 오십오 분이 걸리는 거리. 도로를 따라서 걷기만 하면 되니까 어렵진 않았는데, 어려운 점을 굳이 꼽자면 추위와 지루함이었다. 아직 2월 중순이라 어떤 날은 봄이 바짝 당겨진 것처럼 따뜻했다가도 어떤 날은 창문 손잡이도 잡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추웠다. 종종 눈이 내렸다. 첫 수업이 있던 날 해는 따뜻해 보였지만, 찬 바람 때문에 해의 온기가 닿지 않는 평번한 겨울이었다. 나는 뚜벅뚜벅 걸으면서 부지런히 올라가는 아파트를 구경하고, 아직도 마른 낙엽을 꼭 쥐고 바들바들 떠는 나무들을 구경했다. 거리의 후미진 곳마다 나무 벤치가 하도 쓸쓸하게 앉아있어서 그 위에 사람이 앉기엔 미안할 지경이었다. 보도블록 위에는 며칠 전에 내렸던 눈이 아직도 녹지 않고 쌓여있었다. 보기만 해도 냉기가 느껴졌다. 갈대와 제멋대로 뻗어 나온 잔가지들 위에도 눈이 쌓였다. 너무 추워서 차라리 기름에 튀긴 전이 되려고 밀가루에 버무려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발 디딜 틈도 없이 길 전체가 눈으로 얼어있길래 길을 건너서 해가 드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길을 건너고 나서야 건너온 곳에서 곧 시작될 멋진 풍경을 발견했다. 물길이 난 곳이었는데, 보통은 섬 밖의 바닷물이 슬그머니 들어왔다가 썰물 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빠져나가는 공간이었다. 이런 곳을 뭐라고 부르는진 모르겠으나(유수지라고 부른다) 섬의 테두리와 가까워지면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나는 도로를 가로질러서 다시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물은 거의 없었고, 적셔진 흙만 완만한 곡선으로 얼마 남지 않은 물을 가두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드리퍼 위에 뜨거운 물로 담뿍 적셔진 원두같았다. 새들은 땅에 부리를 파묻어가며 한걸음 한걸음 신중하게 옮겼다. 나는 새들이 먹을걸 찾는 모습을 쭈그리고 앉아 구경했다. 오후 2시의 빛을 받아서인지 짙은 흙에서도 반짝거리는 윤이 났다. 건너편에는 둑을 따라서 길게 심은 가로수가 보였는데, 드문드문 거리를 두고 심은 모습이 이가 나간 것처럼 어설퍼서 귀여웠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정도로 나무가 자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런데 발 밑에 뭔가를 밟은 건지 몸이 기우뚱했다. 발을 치워 살펴보니, 솔방울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작년 12월에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쓰인 솔방울을 모두 모아다가 누군가 이곳에 몰래 버린 것 같았다. 솔방울은 하나같이 다르게 생겼다. 어떤 것은 촘촘하고 어떤 것은 성기고 어떤 것은 노랗고 빨갛거나 재처럼 검었다. 솔방울 사진을 가족들에게 보내자 아빠는 꽃 단추 같다며 시인처럼 말했다. 이제 솔방울을 바라보면 나무로 된 꽃단추가 떠오르고, 갯벌을 바라보면 뜨거운 물에 적셔진 원두가 떠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