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속도로 사는 사람들
두 번째 수업 역시 버스를 놓쳤다. 지각은 확정이었다. 택시를 타면 고작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를 20분은 버스를 기다리는데, 30분은 버스를 타는 데 써야 한다는 사실이 왠지 괘씸하게 느껴졌다. 영종도는 여러모로 차가 없으면 살기 불편한 곳이었다. 첫날은 그렇다 쳐도 두 번째 수업까지 지각하는 건 피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불렀다. 불과 십분 전만 하더라도 지각의 위기에 놓였는데, 강의실에 들어오니 오히려 빨리 온 편에 속했다. 나보다 더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부지런하게 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지난번과 다르게 거의 모든 자리가 비어있어서 어디에 앉아야 할지 고민했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지난번에 앉은자리를 그대로 선택한 것을 보고 나도 같은 자리를 택했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사람들도 모두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 가 앉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재밌는 건 마지막 수업 날까지 수강생 중 아무도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실습시간엔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내 생에 첫 에스프레소였다. 분쇄된 원두를 담고 머신에 장착하고 버튼을 누른 후 투명하고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준비하면 카페에서 본 것처럼 졸졸거리며 진한 커피가 떨어진다. 나는 혹시라도 잔을 제대로 준비하기도 전에 먼저 커피가 나올까 봐 순서를 바꿔서 잔을 먼저 준비하고 나서야 추출 버튼을 누르곤 했다. 학원에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은 한 번에 왼쪽, 오른쪽으로 동시에 두 개의 물줄기가 나오는데, 때문에 항상 잔이 두 개가 필요했다. 내가 내린 에스프레소는 맛이 없었다. 그런데도 맛을 보겠다고 내린 것마다 한 모금씩 먹다 보니 꽤 많은 양의 커피를 마셨고, 나중에는 도저히 못 마시겠어서 싱크대에 갓 뽑은 에스프레소를 그대로 버려야 했다. 아까웠지만 뜬 눈으로 꼬박 날을 새는 것보단 나았다.
커피가 나오기 전 에스프레소 잔을 준비하는 것 말고도 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면 선생님이 자리마다 돌면서 수강생들의 방역 QR코드를 체크했는데, 나와 같은 테이블을 쓰는 조원 중에서 QR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남들은 다 있는 카카오톡도 사용하지 않아서 인증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고향 집에 갈 때면 핸드폰 사용법을 하나 둘 묻는 부모님이 생각나서 앞자리 사람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QR 인증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자며 말을 걸었는데, 연신 고맙다는 말에 도리어 내가 미안해졌다. 알고 보니 앞자리 사람의 핸드폰인 줄 알았던 것은 전화가 불가능한 태블릿이었고 결국 인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앞자리 수강생이 걱정되는 건 나뿐이 아니라 내 또래인 옆자리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서 우리는 QR을 인증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더 시도해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 소동을 겪고 나서 어쩌다 보니 우리 조 세명은 가장 늦게 강의실을 나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옆자리 사람이 방향이 같으니 태워다 주겠다고 했고, 나는 집까지 걸어갈 예정이었으나 프리라이딩을 거절하긴 어려워 하루만 편하게 가자는 마음으로 차를 얻어 탔다. 차에서 영종도 살이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차가 없으면 불편하다는 것과 면허는 있지만 운전은 할 줄 몰라서 연수를 받을 예정이라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그 며칠 전부터 운전연수 어플을 들락거리면서 일정을 잡으려고 했지만, 꼭 결제 단계에 가서 에러가 나는 바람에 열을 식히는 중이었다. 그 말을 들은 옆자리 사람은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 말이 얼마나 쉽게 나왔냐면 거의 커피 한잔 사주겠다는 말처럼 가벼웠다. 나는 이제 고작 두 번 정도 얼굴을 본 사람의 호의가 낯설었다. 친구나 가족들 조차 선뜻해주지 못하는 운전연수를 말이다. 고민하는 나에게 옆자리 사람은 운전병 출신으로 여럿 가르쳐봤다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밥을 살 것을 약속하며 연수를 받기로 했다. 어쩐지 운서를 떠나기 전에 좋은 친구가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의 글에서 옆자리 사람은 커피 친구라고 칭하겠다.
빈말로 흘러가지 않을까 싶었지만, 커피 친구는 금요일이 되자 주말에 연수를 받겠냐고 연락을 해왔다. 토요일이 되었고 나는 세탁기에 있는 빨래를 건조대에 대충 옮겨 놓고는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차가 기억이 나지 않아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앞에서 빵! 클락션이 울렸다. 순간 짜증이 솟구쳤지만 그 생각도 잠시 차에는 시원한 커피 두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선 차가 없는 동네로 갔다. 운전대를 넘겨받은 나는 잔뜩 긴장해서 조심조심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도로는 텅 비어서 앞이고 뒤고 옆이고 지나다니는 차도 없었지만, 왠지 도로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차가 쌩하고 달려올 것 같았다. 곳곳에서 나처럼 운전연수를 받는 초보 운전자들이 보였다. 거북이 속도로 움직이는 차를 보고 있으니 나는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용기를 얹어서 조금 더 힘주어 밟았다. 한 번은 도로가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계속 달릴 뻔했는데, 다행히 옆에서 말려주는 바람에 제 때에 멈출 수 있었다. 그런데도 큰소리 한번 오가지 않은 걸 보면 침착한 사람 같았다. 그렇게 정오에 시작된 연수는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갈 때쯤 끝이 났다.
저녁은 예단포의 칼국수 집이었다. 예단포는 혼자만의 추억이 있던 곳이라서 그런지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영종도에 지낸 세 달 동안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데, 떠나기 직전에 알게 된 커피 친구는 그야말로 예상치도 못한 인연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찾아간 가게의 칼국수도 예상 밖이었다. 국자를 아무리 휘저어도 면이 보이지 않아서 사장님을 불렀더니 해물을 다 건져먹고 난 후에 면을 끓여 먹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괜스레 을왕리와 예단포의 칼국수 스타일이 참 다르다는 말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