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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Jun 13. 2024

범만리 전투

#3. 참혹했던 그날 밤

해피엔딩?

노노!!


새드엔딩?

노우! 노우!


호러블 엔딩이었다. 주인공들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었다는 증거다.      


“이 사람아, 와 이라노.”     

친구 아버지가 분노에 찬 눈빛의 아버지를 끌어안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늦었지만 미션을 성공한 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범이 날뛰면 네 다리를 묶어줄 어른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눈앞에 보이는 잔해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오늘의 전투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곳에는 화가 극에 치달은 범 한 마리가 보였다. 토끼가 사실 확인을 위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범이 수화기를 뺏으면서 전투는 시작된 듯했다. 범이 광분하는 동안 어미 토끼는 멀찌감치 떨어져 망연자실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놀라 밖으로 뛰쳐나간 새끼 토끼 세 마리는  어두컴컴한 솔밭으로 숨어 들어가서는 벌벌 떨고 있었다. 어미 토끼가 걱정되어서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고 말이다.    


안방에 있어야 할 빨간색 유선 전화기는 통신두절 상태로 부서진 채 마당에 내동댕이 쳐져 있었다. TV장 위에 있어야 할 TV는 거실 바닥에 엎드린 채 살려달라며 빌고 있었다. 마당 장독대의 간장 항아리들은 검은 피를 흘린 채 임종을 맞이했다.  현관 유리문은 폭격을 맞은 듯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수류탄까지 사용된 이번 전투는 이전의 여느 전투보다 더 치열한 전투였음을 짐작케 했다.


그때였다. 소나무가 모여있는 으슥한 곳에서 내가 서 있던 마당 쪽으로 빛이 들어왔다. 자동차 운전석에 있던 엄마가 쏴 준 헤드라이트 불빛이었다. 빨리 타라는 신호였다. 나는 사방팔방 깔려있던 지뢰를 피해 조심조심 그리로 갔다. 달려가 얼른 옆자리에 올라탔다. 뒷좌석에는 동생들이 있었다. 동생들이 나를 나무랐다.


“왜 이제 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출발하려고 자동차 기어를 조작했다. 우리는 출발했다. 참혹한 현장을 내팽개치고 어디론가 떠났다. 어디 가는지 묻지도 않았다. 인명피해가 없음에 안도할 따름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아버지는 사람 몸에 손대는 일은 없었다.


'우리 엄마가 얼굴도 모르는 조상 제사에, 묘사에... 일 년에 12번도 넘는 제사상 차린다고 고생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거죠. 쳇.'


엄마와 우리가 아버지께 맞지 않은 것은 아마도 아들을 버리고 떠날까 봐 며느리와 손주들을 지켜주셨던 범만리의 수호신들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조상님들을 지극정성으로 모신 보람이 있었나 보다.  


20분쯤 자동차를 타고 달린 것 같다. 도착한 곳은 엄마의 고향 동네였다. 엄마가 친척들 집에 가서 못다 한 속풀이를 하는 동안 동생들과 나는 차 안에 있었다. 물리적 해방감에 숨이 쉬어졌다. 눈치를 살피면서도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동생들은 웃기 시작했다.


"아까 무서웠지?"

히죽거리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천진난만한 동생들이 우습고 부러웠다.


“얌전히 있어.”

어른인 척 내가 말했다.


엄마의 아버지에 대한 뒷담화가 끝난 후, 우리는 다시 범만리로 복귀했다. 범이 깊은 잠에 빠져든 후라 우리도 조용히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폈다. 고단한 하루가 끝이 났고 잠이 었다. 그래도 뒤끝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다음날은 새로운 날이었다. 전날 일을 다음 날로 끌고 오시는 법은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는 우리 자매들에게는 술자리 피날레를 장식하는 레퍼토리였다. 주님을 모시는 큰 자매님을 제외하고 자매 2(나), 자매 3, 자매 4 님은 때의 트라우마를 주(酒)님을 모시면서 치유해 나갔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부모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힘들어도 도망칠 수 없는 40대 부부의 삶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래도 아버지 존경한다.”


나의 이 말에 범만리 전투의 참혹한 순간을 목격한 자매 4 님은 아직 응어리가 있는 듯했다.


“글쎄, 나는 아직 모르겠는데...”


30대 동생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내가 말한 존경이란 아버지 나름대로 가장으로 중심을 잡으며 끌고 온 세월에 대한 감사였다.


그때는 무서웠다.

지금은 연민이다.


외로운 범만리는

내 마음속 영원한 고향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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