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수광부 Jun 10. 2024

범과의 전쟁

#2. 범의 코털을 건드린 토끼

 결국은 범과 토끼의 전쟁이 시작될 모양이다. 어차피 늘 승자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어미 토끼에게는 공격도 방어도 필요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어미 토끼가 오늘따라 유독 남방한계선을 지키고자 고집을 피웠다. 태화강 똥물 따위는 범에게 줘버려도 상관없었던 새끼 토끼들의 마음도 모른 채 어미 토끼는 안간힘을 썼다.


토끼는 토끼스럽게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 있으면 되는 데 말이다. 범이 날뛰다 잠이 들면 오늘의 전투도 끝이 난다는 걸 새끼 토끼들도 다 알고 있었는데 어미 토끼만 모르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

 

큰 의미는 없어 보였지만 시키니 할 수밖에 없었다. 무기가 될 연장을 치우라는 엄마의 다급한 말에 집에 있는 도끼, 쇠망치 등 손에 잡히는 것들을 작은방 장롱 깊숙한 곳에 숨겼다. 아버지는 외할머니가 우리 자매들과 함께 생활했던 작은방에는 들어오지 않으셨기에 그곳이 안전지대라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은 외할머니와 언니가 집에 없었다. 외할머니께서 그 전투를 보셨다면 아마 지금 땅속에서 울고 계실 수도 있겠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폭발 임계점에 거의 다 온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한 마디만 더 하면 성질이 아주 급한 아버지가 수류탄 안전핀을 뽑는다. 온몸의 털이 기립하며 신호를 주었다. 전신의 세포가 '일동 차렷!' 자세였다. 외딴 범만리에서 아무리 도와달라 소리를 쳐봐도 누구 하나 들을 이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부엉이만이 남의 집 부부싸움을 잡음 없는 써라운드 음향과 입체영상으로 즐기고 있었다.


'부엉아, 모가지를 180도로 돌려도 이건 실화야.'


부모는 끝까지 자식 편을 들었다.


 ‘너희 아비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한이 많아 그런다. 불쌍한 내 새끼를 한 번만 봐줘.’


무덤에 계신 조상님이 이 싸움의 관전 포인트를 나에게 알려주는 듯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고조할아버지까지 보고 계시면서 어찌 한 분도 말리는 사람이 없는지 어린 손녀는 원망스러웠다.


엄마가 시키지는 않았지만 엄마 다음으로 어른인 고작 12살이었던 내가 상황판단을 해야 했다. 멘탈이 나가셨는지 아버지와 맞서 싸우시려는 엄마를 대신해야 했다. 그 시절 휴대폰이 있었다면 경찰에 신고를 했을 것이다. 빨간색 유선 전화기가 있는 안방에 들어갈 용기가 있었다면 그리 했을 것이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무서움에 떨고 있는 동생들을 작은방에 남겨둔 채 도망쳤다. 쓰레빠(슬리퍼)인지 운동화인지를 신고 이웃들이 사는 아랫마을로 달리기 시작했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시골 밭길을 가로질러 장애물 달리기 하듯 뛰었다. 눈물조차 흘릴 여유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풀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래도 다시 일어났다. 달려도 달려도 그 자리인 것 같았다. 후들거리는 내 다리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더 빨리 달려. 니가 늦으면 안 돼. 알잖아. 어떻게 되는지.’


겨우겨우 5분쯤을 달려서 친구네 집 앞에 도착했다. 투명한 유리문틈 사이로 경험해 본 적 없는 따뜻함이 새어 나왔다. 친구네 가족은 TV드라마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아빠도 함께 말이다. 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학교 친구 앞에 이런 꼴로 나타난 내 모습이 비참했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것조차 사치였다. 발발발 떨고 있을 동생들을 위해 용기를 내어야 했다.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친구 아버지가 문을 여셨다.


“수민이 아이가?”

내 이름이 불리자 드라마를 보던 친구와 가족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수민아, 이 밤에 무슨 일이야?”

친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친구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흠. 흠.) 지금 저희 집에 좀. (흠. 흠.) 같이 가야 할 것. (흠.)”

“와? 무슨 일 있나?”


“(흠.흠.)”

훌쩍이며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나를 보고 직감하신 듯했다. 친구 아버지는 아버지와 어릴 적부터 어울렸던 동네 형님이셨다. 목이 늘어난 러닝셔츠 차림의 친구 아버지는 겉옷을 챙기셨다. 친구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아저씨를 뒤따랐다. 뭔가 심하게 쫓기는 내 마음과 달리 천천히 걸어가시는 그 모습에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몰랐다.


 "아저씨. 조금 더 빨리 가야 할 것 같은..."

그렇게 10여 분 만에 집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소설은 결말이 나 있었다.


이전 01화 범이 사는 집, 범만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