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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Jun 16. 2024

범만리, 잘 있어.

#4. 20살의 도망, 독립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어른들 앞에서 일렬횡대로 서서 한 곡조 뽑았던 어린 딸들은 이미 죽었다. 사춘기 딸의 눈에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부산항에서는 노래 부를 낭만이라도 있었지. 독수리 오 남매가 된 이후로는 그런 낭만을 꿈꿀 여유가 없었다. 엄마는 일하느라 바빴고 아버지는 술 마시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 외할머니는 엄마를 대신해 육아하느라 바빴다. 말년에 딸네 집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한 외할머니의 한이 서린 돌림노래가 끝없이 흐를 때면 범만리를 떠나지 않고서는 내가 돌겠다 싶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인구정책을 깡그리 무시하고 다섯이나 낳았을까? 4.2kg 장군감으로 태어난 내가 아들이었으면 딱 좋은 남매였겠지? 낳아보니 딸, 낳아보니 또 딸. 딸만 넷이었을 때 그만두자던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오기를 부렸다. 동서들이 아들을 출산한 후 더욱 초조해지셨는지. 나이 40에 마지막 베팅을 하셨다. 딸 아니면 아들, 확률은 50:50. 백 씨 집안 맏며느리는 그래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4녀 1남이라고 하면 막내아들만 예뻐했을 것 같은데 부모님은 남녀차별을 하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달랐다. 누나들이 막내 유일이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날이면 역정을 내셨다. 사위 집에서 눈치를 보며 고단한 삶을 사셨던 80대 외할머니의 유일한 낙이 유일이었기 때문이다. 유일이는 막내딸이 백 씨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목숨 걸고 얻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유일이를 부려먹는 누나들은 눈엣가시였다.


외할머니는 우리 자매들을 '망할 년의 가시나들'이라고 불렀다. 망할 년은 우리 엄마는 아니고 지나가는 망할 년이었다. 외할머니는 철없는 손녀들이자 유일이를 하대하는 우리 자매들을 아주 못 마땅해하셨다. '우리 유일이를 못 잡아먹어 안달 난 년들'이라며 욕을 찰지게 하셨다. 자매 4 대신 유일이만 사탕을 챙겨주는 날에는 언니는 남녀차별하지 말라며 할머니께 대들었다. H.O.T 팬이었던 자매 3의 질질 끌리던 바지를 말끔히 박음질해 놓은 날에는 난리를 치는 손에게 욕사발을 먹이셨다.


"엄마! 할매가 또 이래놨어. 진짜 내가 미친다. 미쳐!"

"벼락 맞아 자빠질 년!"


80대와 10대의 싸움에 새우등 터지셨던 엄마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까지 보탤 수는 없었다. 현실의 답답함에 뒷 산의 바위에 올라앉아 먼산의 일몰을 자주 바라봤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숨 고르기를 하는 날이 많았다.


고기 애호가이신 아버지 기호를 따라 끼니때마다 고기를 먹었다. 물에 빠진 소고기는 고기 취급도 하지 않을 만큼 잘 먹었다. 그러기에 나의 10대는 불우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불편했다.


무서운 아버지도...

안쓰러운 엄마도...

한 많은 외할머니도...

줄줄이 딸린 동생들도...

그리고 뒷산을 담보로 빌려 쓰는 집안의 빚도...


나를 한 발짝 쉽게 내딛지 못하게 만드는 무언가였다.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던 언니는 고3인 나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부산행에 오르지 않았다. 친척들 행사 때마다 불려 다니고 자주 범만리에 와야 하는 근거리인 부산은 싫었다.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다. 경상도를 뜨고 싶었다. 그러려면  내 선택지는 국립대여야 했다. 공부를 억수로 잘했으면 서울대를 갔을 테다. 하지만 그런 수재는 아니었다. 그래서 충청권역에서 제일 인기 있는 국립대에 안착했다. 연고가 아예 없는 지역에 나를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엄마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다.


 '저 어린것이 저 먼 곳에서 잘 지내겠나?'


엄마에겐 조금 죄송했지만 나는 아주 잘 지냈다. 정말 홀가분했다. 무서운 아버지로부터의 해방, 속 시끄러운 집에서의 해방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온 나라는 IMF 구제금융으로 시끄러웠지만 스무 살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나의 동기들도 그런 듯 보였다. 2명의 친한 여자 친구를 사귀어 안정적인 트라이앵글 체제로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다. 그렇다고 마냥 노는 타입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거기서 쥐 죽은 듯이 최대한 가정에 손 벌리는 일 없이 살면 되었다. 언니는 대학원을 진학한다고 했고, 내 밑으로 대학까지 보내야 하는 동생이 3명이나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은 듯했지만 장학금은 타야 했다. 학기마다 딜레마에 빠져가면서 공부를 했다. 그 결과 전액장학금을 받았고 방학에는 미국, 캐나다로 해외단기연수도 국비로 다녀왔다. 용돈도 많이 쓰지 않았고 간간이 아르바이트도 했다. 잠잘 시간도 모자란 엄마에게 전화해서 '5만 원만 부쳐 줘.'라는 말이 차마 안 떨어져서 정말 아껴 쓰려고 노력했다.   


호객행위에 이끌려 동아리에 가입한 이후로 나의 대학 생활은 더욱 재미있게 전개되었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소중한 에메랄드빛 유전자는 동아리 생활에서 아주 빛을 발했다. 당시 소주 2병에도 끄떡없는 나였기에 선후배들의 술자리에 호출이 잦았다. 불러주면 신이 났던 나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것에 부심이 컸다. 털털한 성격으로 선배들의 귀염둥이, 동기들의 편안한 여사친, 남자 후배들의 연애 상담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누나, 뭐해요?”

“나 전공과제 중”


“술 마시러 와요!”

“콜! 금방 끝내고 갈게."


동아리 행사 뒤풀이를 가면 걸 그룹 춤은 못 췄어도 탬버린만큼은 흥을 돋울 정도로 흔들었던 것 같다. 뭔가 내 안의 답답함을 해방해 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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