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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Jun 20. 2024

내 꿈은 서울

#5. 드디어 서울 입성

"근데, 너는 왜 부산대나 경북대 안 가고 여기 왔어?"


고향이 경상도라 하면 친구들은 이렇게 물었다. 차마 갑갑했던 집을 떠나 멀리 도망 왔다고 말할 수 없어 대충 얼버무렸다. 충청권 애들에게 충청 이남 지역은 관심사 밖이다. 울산이 어딘지, 구미가 어딘지, 김천이 어딘지 모르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그래도 내 고향은 화려했던 신라의 도읍지라는 그 명성만으로도 애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래도 내 고향을 '변방'이라고 놀리는 애들도 있었다. 내가 보기엔 서울이 아닐 바에야 충청도나 경상도나 매 한 가지여서 그것에 기죽지는 않았다.


대학교 동기들 중에는 나처럼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차마 인서울 사립대학을 가지 못하고 집 근처 국립대에 머문 애들이 많았다. 친척 한 둘 정도는 서울에 있는 경우가 많아 그들은 서울 나들이를 쉽게 했다. 그들을 보면서 나에게도 서울이란 도시가 친근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감히, 서울?'에서 '서울, 까짓것!'이라는 생각에 서울로 취직을 했다.


처음 대도시 서울에 왔을 때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서울에 가면 소매치기를 당할까 봐 지하철에서 지갑이 든 백팩을 앞으로 메고 서 있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타인의 삶이나 모습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대부분이 무표정이었다. 탁한 공기, 꽉 막히는 도로처럼 답답함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대한민국의 중심, 서울이 좋았다. 서서히 서울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지하철 노선도에 익숙해지는 것만큼 높은 방세, 높은 물가에도 익숙해져 갔다.  

 

 이듬해, 언니가 결혼했고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신혼집을 차렸다. 그즈음 자매 3 역시 졸업 후 취업을 서울로 했다. 월세 기한이 남은 형부가 쓰던 한 칸짜리 방, B103호에서 자매 3과의 화곡동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 둘은 강남구 소재의 직장을 다녔는데 화곡동에서 생활했으니 출퇴근 왕복 시간만 2시간 반이 넘었다.


"어디 살아요?"

"화곡동이요."


"거기가 어디예요?"

"서울인데... 강서구에 있어요."


"처음 들어보네."

"목동에서 김포공항 가는 쪽에 있어요."


"아~"


이런 질문과 대답이 오갈 때면 느낌이 왔다. 서울 어디에 사냐는 질문으로 상대의 경제적 위치를 가늠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에게는 인 서울이면 감지덕지였지만 서울 사람들에게는 어느 동에 사느냐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도곡동, 서초동, 청담동, 압구정동, 한남동, 동부이촌동 등에 산다고 하면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듯 보였다. 상대의 눈빛조차 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산다고 하면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을 보며 당시에 화곡동은 서민들의 주거지가 확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동네 이름과 아파트 이름 표기가 사라진 도로명 주소가 정착된 것은 아주 잘 된 일 같다.


화곡동이 서민들의 주거지였지만 지방집값과 서울집값이 같을 수가 있나?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서울집세였다. 그래도 화곡동은 부모님이 생각하시는 돈으로도 부동산에 가면 무시당하지 않고 이 집 저 집을 구경시켜주곤 했다. 자매 4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면서 우리는 우장산 아래 화곡동 방 2칸 다가구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우장산에 가서 약수를 받아오고 주유소  대패 삼겹살 집에서 주()님의 세 자매가 술 한잔씩 걸치며 가족모임을 하기도 했다. '배불리 먹지 못해 감질났던 추억'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화곡역까지 10분을 걸었고 5호선을 타고 영등포구청역에 내려 2호선으로 환승을 했다. 대림역까지 2호선을 타고 가서 7호선으로 환승을 했다. 재수가 없으면 앉지 못하고 50분을 지하철에서 서 있어야 했다. 지친 몸으로 회사에 출근을 하고 하루종일 혹사 당하고 밤늦게 퇴근을 했다. 막차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화곡동집까지 와서 짧은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화곡동에서 또 그 먼 여정을 할 때면 진짜 강남 근처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매 3도, 자매 4도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오갔기 때문에 도저히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

욕심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돈은 얼마 없었다.


그럼에도 세 자매의 간 큰 도전이 시작되었다.

'강남 근처로 이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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