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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Jun 09. 2024

범이 사는 집, 범만리

#1. 범만리에서의 10대

역마살이 꼈나?

지방 촌놈이라 그런가?


나의 주민등록초본은 3장이다. 거기에는 고단했던 이사 이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손에 잡고 있던 방아깨비를 놓아주면 훌쩍 건너뛰어 도망가듯 폴짝 팔짝 자주 옮겨 다녔다. 월세 계약기간인 1년 만에, 전세 계약주기였던 2년 만에, 짧게는 10개월짜리 이사도 있었다.  


집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면 이사를 하지 않았을까?

현실이 만족스러웠다면 거기서 눌러살았을까?


나에게 이사는 현실에 대한 도피였다. 불편한 마음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는 회피였다. 그래서 속이 시끄러울 때마다 이사를 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이었기에... 이사는 나에게 무언가를 새로 그릴 수 있는 흰 도화지였다.


출생신고지는 따뜻한 남쪽, 부산직할시였다. 궁합이 전혀 맞지 않는 중매커플인 부모님은 결혼을 하시고는 부산으로 가셨다. 부산일보 보급소, 쌀집, 세탁소, 냉면집 등 맥락 없는 업종변경을 해가면서 열심히 사셨다. 태어날 때 몸무게가 4.2kg이었던 나를 42kg의 마른 엄마가 업고 냉면을 조리하고 서빙했다는 게 경외로울 따름이었다. 시원하고 상큼한 냉면 맛을 기대한 손님들이 원하는 비주얼은 아니지 싶다. 손님이 있었을까 싶다.


 신문보급소를 할 때는 배달 삼촌들 고봉밥을 해 먹이느라 엄마의 고생은 말도 마라였지만 호탕하신 경상도 사내 아버지 눈에는 그 고생이 들어왔을 리가 없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신 아버지는 안 좋은 일에 휘말리셨는지 도망치듯 딸 셋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그때는 내가 7살이 되기 전 추운 겨울이었다. 그 이사가 도피였는지 희망이었는지 어린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북도 경주이다. 빈털터리로 고향으로 내려간 날, 그곳에는 아버지의 새엄마와 이복동생(나에게 고모)들이 살고 계셨다. 우리 식구가 경주로 가면서 그들은 부산으로 쫓겨가야 했다. 한 공간에서 밥을 같이 먹는 식구가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의 그들에 대한 미움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트럭도 아닌 기차를 타고 아버지의 고향집으로 이사 온 오후의 풍경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마루에 앉아 달라진 바깥 풍경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도시에서 온 귀한 동갑내기에 대한 호기심이었겠지? 땟국물이 흐르던 한 여자 아이가 용기를 내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안녕하지 못한 마음으로 '안녕?'이라고 말했고 우리는 둘도 없는 유년시절 친구가 되었다.


언니가 중학생이 될 즈음, '범만리'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정식 마을 이름은 아니었다. 옛날 TV프로그램 '전설의 고향'의 주인공들이 사는 곳이었다. 거기는 나의 엄마조차 본 적이 없는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께서 묻혀있는 산이었다. 나의 고조, 증조까지 수호신이 되어 우리를 지켜줄 그 산 중턱에 아버지는 무허가로 집을 지으셨다. 아버지께는 최고의 명당자리였다. 외딴곳이었다.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오솔길이 있는 전원주택이었다. 소나무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힐링캠핑장도 있었다. 마음이 답답한 날이면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막 달릴 수 있는 몇 백 평의 초원도 있었다. 그 초원에는 큰 바위 하나가 멋스럽게 박혀 있었다. 고작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바위에 올라타서 먼산을 허기진 마음으로 바라본 적이 많았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

낭만적인 전원주택에는 포효하는 범이 살고 있었다.    


범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어미를 잃었다. 새 어미가 나타났다. 인정하지 않고 새 어미를 안동댁이라고 불렀다. 어미를 잃고 방황하던 차에 아비마저 잃었다. 남은 것은 결혼까지 책임져야 할 남동생 3명과 재산을 나눠야 했던 어미가 다른 여동생 3명, 그리고 안동댁 뿐이었다. 지독한 현실이 싫어 월남으로 훌쩍 떠났다. 전쟁터에서 싸우다 와서인지 무서울 것이 없었다.


범은 가족을 꾸렸고 자식을 5명이나 낳았다. 장남이자 참전용사였던 범은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것에 익숙했다. 그리고 식성은 늘 육식이었다. 저 푸른 밥상인 날에는 예민해진 범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다들 조심했다. 범이 포효를 하는 날이면 다들 물어뜯길 각오는 해야 했기 때문이다. 범이 깨어있는 동안은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도 술만 마시면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드는 범이었는데 그날은 조금 이상했다.

 

그날 밤, 술 취한 아버지의 기침소리를 타고 바이러스가 집안 곳곳에 퍼지기 시작했다. 백신이 개발되지 않은  지독한 바이러스였다. 아버지는 시장에서 처가(엄마의 친정) 쪽 일로 체면이 상한 일이 있는 듯했다. 안방의 공기는 이미 바이러스 위기경보단계 '주의'에서 '경계'로 격상 중이었다. 막둥이만 아들인 오 남매의 둘째였던 나는 이런 날이면 듬직한 오빠가 둘이나 있는 땟국물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나 모른다. 힘없는 초등 여자 아이들에게 범을 닮은 아버지는 공포 그 자체였다.


'제발! 그만하시라고요!'  


도저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세 살배기 막둥이 남동생을 안방으로 밀어 넣었다. 작전명은 애교 1번이었다.  어린 자식을 봐서라도 참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부부가 말싸움을 하는 옆방에서 우리 형제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공포소설의 위기-절정의 순간을 초 단위로 써 내려가야 했다. 평소라면 한발 물러나셨을 엄마도 친정일이라 지지 않으려 애쓰셨다. 사위집에 얹혀사셨던 외할머니에 대한  설움까지 한 스푼 더해서 울분을 토해내셨다,


 엄마의 항변이 타당한지 아버지의 태도가 당연한지는 어린아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냥 이 위기감이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헛된 기대뿐이었다. 절정의 순간이 치닫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결말은 뻔했지만 절정을 써 내려가는 건 아버지 마음이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대포가 날아올 것인가?'

'총기를 드실 참인가?'


소설은 위기를 넘어선 듯했다. 절정을 준비하듯 엄마가 갑자기 방에서 뛰쳐나오셨다.


"밖에 있는 연장들 다 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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