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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몽중(夢中)

by 백수광부

[소설 : 핸섬 가이즈]


10. 몽중(夢中)


그녀는 오토바이 굉음과 함께 사라졌다. 세종은 뭔가에 홀린 듯 그녀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소리가 멈춘 곳에 도착한 세종은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번화가의 한 술집 건물 주차장에 그녀의 오토바이가 있었다.


세종은 곧장 건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3층은 호프집, 7층 Bar. 세종은 끌리는 대로 Bar가 있는 꼭대기 층을 눌렀다.

‘나 여기까지 왜 온 거지?’


세종은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조심스레 Bar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곳은 처음이었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청보랏빛 조명에 눈물막이 출렁했다. 뭔가 자신을 휘감는 분위기였다. 싸늘하면서도 노곤해지는 느낌이었다. 바 테이블 앞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바텐더였다.


그녀는 손님인 세종을 보고도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흔들리고 당황했다.


술을 마시지 않아 호프집도 익숙지 않은 세종에게 Bar는 상당히 어색했다. 겨우 용기 내어 그녀 앞자리에 앉았다. 정면에 앉지 못하고 그녀 왼쪽으로 35도 각도 방향에 앉았다.


그녀가 내민 메뉴판을 펼쳤다. 술을 마셔보지도, 관심을 가져보지도 않은 그에게 칵테일 이름이 적힌 메뉴판은 어려운 전공 서적 같았다.

그는 좋아하는 과일인 복숭아 그림만 보고 메뉴를 골랐다.


“주문할게요.”


바짝 다가온 그녀를 향해 속삭이듯이 복숭아 그림 옆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Sex on...... the beach.”


세종은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귀가 달아올랐다.


‘무슨 칵테일 이름이 이래? 어후.’


세종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내리깔고 휴대폰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쉐어커에서 얼음이 달그락거리며 소리를 낼 때마다 그녀의 모습이 궁금해서 얼굴을 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부끄러웠다.


드디어 쉐이킹 소리가 멈췄다. 세종의 모든 감각은 그 소리에만 쏠려있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청각, 후각, 촉각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소리,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액체가 흐르는 소리가 났다. 부스럭부스럭 소리도 났다. 후각은 이미 피치와 알코올이 뒤엉킨 달콤한 트로피컬 향으로 마비가 되었다. 점점 그 향이 가까워질 때쯤 그녀가 칵테일을 내밀었다.

하트모양 프레즐 기본 안주와 함께….


여전히 세종은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쑥스러움과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어후~ 겨우 고른 게 ‘섹스 온 더 비치’라니. 온세종, 이 미친놈.’


그 유명한 칵테일을 처음 본 세종은 마음을 뺏겼다. 발그레한 색감에 마음이 일렁일렁할 때쯤 30대 중후반 남자 손님 둘이 들어와 세종 옆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그녀와 익숙한 듯 웃으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녀의 관심이 그들에게 쏠릴 무렵에서야 세종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경양식 집에서 본 그녀의 모습은 세온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Bar에서 본 남자들과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세온과는 달랐다.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나 뭐에 휩쓸린 거지? 누나일까? 그녀일까?’


세종은 눈앞에 있는 복숭아 음료인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나쁘지 않았다. 신입생 OT 때 선배들이 억지로 권한 탓에 입에 대어 본 소주와는 달랐다. 쓰지 않고 달았다.


달콤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단맛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맛에 홀렸다.


그녀가 남자들과 즐겁게 대화하며 웃을 때마다 세종도 한 모금씩 마시게 되었다.


한 잔을 다 마셨을 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세계로 빠졌다. 찰랑찰랑하는 바다에 상반신이 점점 잠기듯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취기는 결국은 세종을 쓰러뜨렸다.


세종은 오른팔을 뻗어 얼굴을 뉘었다.

세종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이 부셔 눈꺼풀을 반쯤 내렸다. 좁은 동공으로 밀려 들어오는 빛줄기 앞에서 냉정한 그는 이미 없었다.


깊은 내면에서 소년의 미소가 툭 하고 튀어 올라왔다. 어린 시절 누나와 강가에서 놀던 때가 생각났다. 행복이 얼굴에 퍼졌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세종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복숭앗빛으로 보였고 심장은 두근거렸다. 그녀가 세종에게 다가왔다. 그에게 복숭아는 앵두로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요.”


“취하셨나 봐요.”

“그런가 봐요.”


그 와중에도 취하지 않은 척 발음은 명확히 하려 했다. 노련한 남자들 앞에서 어린 청년이 지키고픈 자존심이었다.


“방심하면 금방 취하죠.”


세종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방심한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그녀를 1초라도 더 보고 있으면 그 심오한 눈빛에 빨려들 것만 같았다.


“저기, 정말 괜찮으세요?”


그녀가 더 가까이 세종의 왼쪽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향이 세종을 흔들며 자극했다. 세종은 감은 눈에 힘을 서서히 주어 눈을 뜨려 했다. 앵두 빛이 동공으로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그리되었다.


몽중(夢中)이었을까?


촉촉함을 느낀 건 단 1초였다.


“이 새끼가 미쳤나?”


갑자기 누군가 세종의 의자를 발로 찼다. 옆에 있던 의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세종은 바닥에 고꾸라졌다. 손님들이 놀라서 쳐다봤고 바텐더 그녀와 얘기 중이던 남자 둘은 세종을 향해 욕을 퍼부어댔다.


“술 처먹었으면 곱게 집에 가서 잘 것이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맞아도 아무 느낌이 없던 세종은 일어서려 했지만 제대로 일어설 수 없었다. 남자들이 그를 때리려고 할 때 그녀가 제지했다.


“술 취해서 실수했나 봐요.”

“에이, 재수 없는 새끼. 술맛 떨어지게.”


그녀는 그 남자들을 진정시켰고, 세종을 일으켜 조용한 소파 자리에 기대게 했다.


그녀는 다시 바 테이블 쪽으로 가서 그 남자들을 향해 웃어주었다. 세종을 흘끔흘끔 보면서 말이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세종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계산대로 다가가 카드를 건넸다.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카드 영수증을 받았다.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세종은 꽂혀있는 펜을 들어 영수증 뒷면에 무언가를 썼다. 그리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는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겨우 일을 마쳤다. 무거운 몸을 엘리베이터에 싣고 1층으로 내려갔다.


오토바이에 올라 시동을 걸려는 순간, 곱게 접혀 꽂혀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재수 없는 새끼 : 010-1234-5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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