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미친놈.”
반듯한 청년, 진한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대국 고시원 앞에 술이 떡이 된 지영과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세종을 향한 말이었다. 거친 말은 멈출 수 없었다.
“아 정말, 배지영! 정신 좀 차려 봐.”
그때였다. 핑크 수면 바지를 입고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여자가 말을 걸었다.
“어, 혹시?”
“예?”
“얘 혹시 지영인가요?”
“아세요?”
고개를 떨군 배지영의 면상을 제대로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지영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지영아, 지영아. 얘 왜 이래요?”
“보시다시피, 술이 잔뜩 취해서요. 근데 혹시 친구예요?”
“네. 같은 과 친구요.”
“그럼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진한은 정중하게 그 여자에게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지영이 집까지 얘를 데리고 가야 하는데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요. 여자들도 술 취하면 엄청 무겁네요.”
“제가 도와줄게요.”
그녀는 지영의 한쪽을 부축하다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머. 얘 왜 이래요? 철을 씹어 먹었나?”
“흠…. 아무래도 더 가는 건 무리죠?”
“흠. 오늘은 제 방에서 재우는 게 낫겠어요. 지영이 부모님께는 제가 전화할게요.”
“그래 주시면 저야 너무 감사하죠.”
그렇게 둘은 합의했다. 진한은 남은 힘을 다해 지영을 그녀가 사는 대국 고시원 2층까지 끌고 가서 겨우 눕혔다. 그러고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기어나갈 수도 없을 만큼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가 주는 물 한잔을 마셨다.
“고마워요.”
진한은 물을 마시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좁고 삭막할 거라고만 생각한 고시원 방이 아주 화사했다. 꽃밭에서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듯, 각종 핑크 소품과 깜찍한 인형들이 웃고 있었다. 남동생만 있는 진한에게 이런 여자 방은 처음이었다.
“이민영이라고 해요. 지영이랑 단짝이죠.”
“아, 저는 지영이 고교 동창, 석진한입니다.”
“아~ 컴공 뇌섹남? 히힛.”
“어! 어떻게?”
“지영이랑 종일 붙어 다녀요. 모르는 게 없죠.”
“아….”
그녀의 상큼하고 발랄함이 진한은 좋았다. 후들거리던 다리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그때 지영의 코 고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려왔다.
“지영이 많이 피곤했나 봐요.”
“젊은 여자들도 코를 고나 보네요.”
“어머! 여자에 대한 환상이 있으시군요.”
“그런가요? 하하.”
“우리 같은 1학년인데 말 놓을까?”
“좋아. 그러지 뭐.”
민영은 진한에게 미소를 보낸 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왜?”
“아까 편의점에서 사 온 간식이 안 보여서.”
“음…. 너 지영이 부축하고 오면서 1층에 두고 온 거 아니야?”
“어머, 그랬나 보다.”
진한과 민영은 1층으로 함께 내려갔다. 검은 봉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힝. 오늘 저녁이었는데….”
민영의 그 혼잣말이 진한의 귀에 들렸다.
“민영아, 나 출출한데 우리 뭐 좀 먹으러 갈까? 팔다리가 후들거려.”
핑크 꽃무늬 수면 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는 진한을 빤히 쳐다봤다.
“그럴까? 요기 앞에 잘하는 포차 있는데.”
진한과 민영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금세 친해졌다.
둘은 포차에 들어가서 떡볶이와 순대를 시켰다. 야외 테이블에서 둘은 스스럼없이 순대를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으면서 야식을 즐겼다.
“어!”
진한은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세종을 발견했다. 가서 왜 나를 버리고 갔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러질 않았다. 화난 마음도 사라질 만큼 민영이 귀여웠다. 늘 여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다. 상상한 여동생의 모습과 같았다. 복슬복슬 비벼대는 푸들 같았다. 망글망글 피어나는 트리안 같았다.
“너는 똑똑한가 봐. 지영이에게 들었어. 대회나 공모전 같은 데서 상도 많이 받고 장학금도 늘 놓치지 않는다고.”
“지영이가 그래? 은근 뒤에서 사람 칭찬하네.”
“지영이가 착해.”
“너도 착한 것 같아.”
그때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한의 휴대폰이었다.
“형!”
진오였다.
“언제 와? 정우 형 난리 났어. 왜 다들 안 오냐고.”
“알았어. 지금 들어가.”
진한은 민영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오늘 고마웠어.”
“내가 고맙지. 지영이 챙겨줘서.”
둘은 그렇게 포차에서 헤어졌다. 진한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피어났다.
호프집은 엉망진창이었다. 술 취한 우빈과 수창은 소파에 大자로 퍼질러 누워있었다. 그들을 어찌해보려던 정우는 허리를 삐끗했는지 소파 귀퉁이에 엎드려 앓는 소리를 했다.
“아호. 나 죽네. 나 죽어.”
진오는 깊은 한숨을 여러 차례 내뱉고 있었다. 진한은 그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났다. 자꾸만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피어났다.
“형, 왜 그래?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
“아니, 아니.”
그런데도 진한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