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핸섬 가이즈]
14. 그리울 사람
결국 세종은 인정하기로 했다. 그녀의 입술에 닿았던 그 1초 동안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했던 자신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버렸단 사실을. 꿈속이었을 거란 착각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만 떠올리면 온몸의 감각이 미세하게 요동쳤기 때문이다.
자신조차 정의할 수 없던 그녀에 대한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만 떠올리면 몸속 세포들이 탁구공처럼 날뛰어 아무것도 차분하게 할 수 없음을. 이것이 미묘하게 빠져드는 사랑이라는 것임을. 세종은 서서히 알게 되었다.
세종은 더는 참지 못하고 Bar를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일을 그만둔 상태였다. 그래서 대국 고시원 앞으로 달려갔다. 거기에도 그녀의 오토바이는 없었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그녀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잠시 잠깐 세종을 데워준 온기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꼭꼭 숨어버렸다. 세종에게 그 온기는 허기를 달래주는 그리움이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더욱 그녀를 찾게 되었다.
1학년을 마무리할 12월 중순 즈음, 세종은 어머니께 전화를 받았다.
“예, 엄마.”
“아버지가 폐암 말기란다.”
“···.”
“내 남편은 아니어도 네 아버지잖아.”
“병원 알려줘요. 가볼게.”
“그리고.”
“그리고 또 뭐?”
“병무청에서 너한테 등기우편 하나 왔던데.”
“아….”
“너 혹시 군대 자원했어?”
“빨리 다녀오려고.”
“엄마한테 말도 없이.”
“말해봤자 걱정밖에 더 해?”
“아버지 임종은 봐야 할 텐데.”
“···.”
세종은 아버지가 계신다는 병원을 찾아갔다.
누나의 장례식 이후 아버지를 본 적은 없었다. 떠올리기도 싫었다. 난폭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부모의 이혼이 떠올랐다. 그러면 죽은 누나까지 한꺼번에 줄줄이 생각났다. 그래서 더욱 생각하기 싫었다.
차마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6인 입원실 열린 문으로 홀로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창밖을 무던히 바라보고 있었다. 깊게 패인 세로 주름이 가득한 마르고 건조한 생명체.
그 시커멓게 타버린 성냥개비 같은 몸을 보고 있자니 연민이 올라왔다. 한때 활활 타오르던 활화산이었던 그는 이제 곧 꺼질 운명이었다.
‘재가 되어 사라지겠지. 자식들에게 사랑 한번 받지 못한 사람. 아직은 그래도 젊은데, 저 먼 곳으로 가버린다니. 원망조차 제대로 못 했는데, 그래서 놓아줄 자신도 없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다. 나는 무얼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세종은 마음속에서 아버지께 편지를 써 내려갔다.
To. 훗날 그리울 아버지
아버지. 안녕하십니까?
나의 아버지. 안녕하십니까?
저는 당신이 그립지 않습니다. 곧 이별이라니 노력할 뿐입니다. 사실 노력해도 쉬이 용기가 일지 않습니다.
쌓아온 미움과 직면할 자신이 아직 없습니다. 당신에게 다가갈 용기가 일지 않습니다.
애처로움이 생기긴 합니다. 외로운 사람이었겠구나!
그래서 가까이 가보려 하지만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부모 자식 사이임에도 이리 다가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돌아섭니다.
다시 오겠습니다.
다시 안녕하시냐고 물으러 오겠습니다.
세종의 깊은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병원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숨을 깊게 내쉬었다.
세종은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조금 호전되었다는 연락을 어머니를 통해서 전해 들었다. 그래서 계획대로 입대했다.
세종은 훈련소를 거쳐 전남에 있는 특수전투부대 소속이 되었다. 하루하루 힘든 훈련을 버티며 생활하던 중 중대장이 휴가를 다녀오라고 했다. 세종은 직감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세종은 아버지 곁에 있어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죽어서야 아버지 곁에 딱 붙어서 오랜 시간 함께 했다.
아버지 장례식의 상주(喪主),
그 주인이라는 중요한 역할로 그의 곁을 지켰다.
장례식 후, 세종은 어머니를 이모 집에 모셔다드리고 부대에 복귀했다. 부대에 돌아오니 그는 어느새 관심 사병이 되어 있었다.
소대장은 매일같이 세종을 불러 일상을 물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기분은 어떤지 물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를 관심 사병으로 만들었다.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이었나?
며칠 후, 세종은 진짜 온 부대의 관심 사병이 되었다. 요일별로 다른 색의 연애편지가 매일 부대로 배달되었다.
“온세종 이병, 편지 왔다.”
“또 너야?”
과 동기인 가은이 어떻게 알아냈는지 매일같이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에 선임들은 부러움과 시기 질투를 쏟아냈다.
세종에게 가은은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매일 오는 편지에는 익숙해져 버렸다.
어느 날, 부대로 불쑥 찾아온 가은은 세종에게 고백했다. 하지만 세종은 받아주지 않았다.
비워두고 싶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그 자리는 비워두고 싶었다.
“너한테 들인 내 시간은 아무 의미 없는 거야?”
“고마워. 그래서 미안해.”
“나 좋다는 사람 많아.”
“···.”
“그래도 나는 네가 좋은데, 너는 아니구나.”
“사람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 안 돼.”
그녀는 결국 울면서 돌아갔다. 더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녀에게 너무 익숙해졌던 걸까?
아니면 많이 외로웠던 걸까?
아니면 그녀가 그리웠을까?
제대를 앞둔 시점에 세종은 먼저 가은에게 연락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