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커플에겐 좋고 솔로에겐 나빴다. 커플들은 성능 좋은 접착제처럼 반쯤 겹쳐 들러붙어 다녔다. 그래도 여자 솔로 둘은 팔짱이라도 끼면서 보온을 유지했지만, 정우는 달랐다. 두 팔을 꼬고 어깨를 접어 움츠려도 춥고 추웠다. 피하지방이 부족한 삐쩍 마른 몸에 누구 하나 관심 가져주는 이가 없어 더욱 그랬다. 몹시 추웠다.
추위를 피해 도서관에 갔다. 책은 언제나 포근했다. 금방 노곤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서관이 좋았다. 칸막이 없는 열람실 책상에 자리를 잡고 두꺼운 전공 책을 턱에 괴곤 상체를 엎드렸다. 졸음이 밀려오던 찰나, 맞은편에 우빈이 보였다. 정우는 우빈과 눈이 마주쳤다. 우빈은 친구인 ‘쓰레기’를 버리고 ‘쒸레기’ 정우 쪽으로 책을 싸 들고 왔다. 우빈은 소리를 죽여 조용히 정우에게 말을 걸었다.
“형도 도서관 다녔어?”
“몸 좀 녹이려고.”
“형은 하는 짓이 왜 이렇게 귀여워?”
탄탄한 몸을 가진 우빈의 눈에는 말라비틀어진 정우의 휘청거림 자체가 신비롭고 귀여워 보였다. 힘없고 의욕 없이 펄럭이는 종이 인형 같은 허깨비 정우에게 마음이 쓰였다.
“너는 왜 매번 나한테 애교 부리냐?”
“좋아서 그러지.”
정우도 싫지 않았다. 별 볼 일 없는 정우에게 만인의 연인인 우빈이 관심을 가지니 도서관의 여학생들이 신기한 듯 정우에게 주목했다.
“잠깐 나가자.”
정우는 쏟아지는 시선이 부끄러워 우빈을 데리고 매점으로 갔다.
“뭐 마실래?”
“형이랑 같은 거.”
“야! 너 혹시?”
“혹시 뭐?”
“남자 좋아해?”
“뭐? 하핫.”
정우는 우빈에게 바나나 우유를 건넸다. 둘은 어린 소년들처럼 달콤한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툭 꽂아서 쭉 빨아 당겼다. 정우는 바나나 우유가 달면서도 성장시켜줄 것만 같아 좋았다. 쓴맛 없이도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해줄 것만 같았다.
“근데, 형. 궁금한 게 있어.”
“궁금하지 마.”
“혀어엉~~”
“너는 또 뭐? 뭐가 궁금한데?”
“형은 연애 해봤어?”
진한이 우빈에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우가 애가 있다는 사실을.
“아니.”
“한 번도?”
“응.”
“그 나이 먹도록 뭐 했어?”
“그래도 여자랑 잠은 자 봤어.”
정우는 우빈 앞에서 남자의 허세를 부려보고 싶었다.
“뭐? 형 그런 사람이었어?”
“응. 난 그런 쒸레기였어.”
정우가 자조적으로 툭 뱉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거지?”
“사정은 무슨.”
“그래도 난 형이 좋아.”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낯간지럽게.”
정우는 부끄러움이 일어 도서관 열람실로 줄행랑을 쳤다. 우빈은 추워서 자꾸 첫사랑 그녀가 생각났다. 그래서 자꾸 정우를 놀렸다. 웃고 싶어서. 잠시라도 웃고 싶었다.
도서관 열람실에 도착한 정우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작은 종이가방을 발견했다. 뭔가 싶어 속을 들여다보았다. 하트모양의 명품 수제 초콜릿 세트와 쪽지가 들어있었다. 얼핏 보니 발렌타인 12년산 위스키 봉봉 초콜릿이라고 적혀있었다.
정우 책상에 놓여있었지만, 우빈의 것임이 분명했다. 우빈을 좋아하는 어떤 여학생이 두고 간 게 분명했다. 정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빈도, 묘령의 여인도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종이 가방 속 쪽지를 자신의 주머니 속에 숨겼다. 그러곤 화장실로 향했다. 쪽지를 펴보았다.
“당신의 미소는 내 마음을 녹여요.”
구겨버렸다. From도 To도 없으니 죄는 아니었다. 양심에 조금 찔리긴 했지만, 완전범죄를 꿈꿨다.
‘앙큼한 여자네. 초콜릿에 술은 왜 넣어?’
우빈에게 누군가 생기면 안 되는 시기였다. 곧 크리스마스 대목이기 때문이었다. 쓰레기통에 쪽지를 버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우빈이 자리에 와 있었다.
“형, 이거 뭐야?”
“야, 나가자.”
정우는 후다닥 초콜릿을 챙기고 책을 가방에 쑤셔 넣곤 급히 밖으로 나갔다. 우빈도 곧이어 따라 나왔다. 범죄를 저지른 자는 항상 쫓기는 법. 정문을 향해 달려가려는 정우의 후드를 우빈이 낚아챘다.
“형, 차 타고 가자. 추워.”
우빈은 정우를 강제로 끌어서 본인 차에 태웠다.
“네 차야?”
“응.”
“넌 없는 게 뭐야?”
“그러게. 다 가졌지.”
정우는 엉덩이가 뜨거워지기 전에 추위를 녹일 무언가가 필요했다. 초콜릿을 하나둘 까먹기 시작했다. 빨리 증거를 인멸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아우, 맛있네.”
“혼자 먹어? 나는?”
“이거 위스키 들어간 초콜릿이야. 넌 운전 중이잖아.”
“근데 갑자기 그게 어디서 난 거야?”
“나 좋다는 여자가 두고 간 거야.”
“진짜? 형 은근히 인기 많네.”
“몰랐어?”
“알지.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진 형의 매력.”
우빈은 못생긴 남자 정우에게 멋있다. 멋있다 주문을 거는 사람 같았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가수의 노래와 위스키 특유의 향이 정우를 적당히 기분 좋게 만들었다. 구름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느낌이었다. 노래가 절로 나왔다.
“못생긴 애들 중에 내가 제일 잘생긴 것 같대~♪♪”
“그렇지. 그래서 우리 ‘오늘부터 1일’이야?”
“차 세워! 도저히 너랑 같이 못 있겠다.”
정우가 반응하니 우빈은 더욱 신이 나서 그를 놀렸다.
“내가 뭘 어떡하면 넌 내 맘 알겠니? 너만 생각하면 미치겠어. 오후오후오오~♪♪”
우빈도 노래에 취해 따라 부르니 정우가 피식 웃었다. 우빈의 필살기는 끝이 없었다. 확실히 정우를 죽여 놓았다. 그의 환한 미소와 애교 섞인 장난은 정우를 천상으로 끌어올렸다. 아마 우빈은 그녀와 사귈 때 마음껏 잘해주지 못해서, 그녀를 너무 힘들게 해서, 그래서 떠나가게 만들어서, 그게 아쉬워서 지금 정우에게 사랑을 퍼붓고 있었다.
우빈은 체력이 다한 정우를 집에 바래다주었다. 마지막까지 정우에게 헤드록을 하고 그를 보내주었다. 돌아서는 우빈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