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와 에피소드에 담긴 애정.
2년 전에 그들을 만났다. 거의 15년 만이었다. 조금 어색했던 모양이다.
“어디 아파?”
나름 다정한 말이라고 건넨 첫인사가 말실수가 되었다.
“늙었단 얘기지?”
J의 말을 듣고 아차 싶었다. 나는 T스러움을 쥐어박고 싶었다. 뭐라고 말했어야 했을까? 그들이 내게 한 거짓말처럼 나도 그랬어야 했다.
“그대로네.”
달콤한 거짓말은 덫인 줄 알면서도 기분이 좋다. 그들은 언제나 내게 다정했다. 나는 '따르라'에 익숙했고 그들은 '따르리'에 익숙했기에 우린 제법 잘 어울렸다.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라주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외모를 자세히 보며 '그대로'가 아님을 인지했다. 흰머리도 늘었고 주름도 생겼다. 하지만, 금세 젊은 날로 회귀할 수 있었다. 함께 한 추억이 있었으니까. 그 시절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함께 웃을 수 있었고 어려질 수 있어 좋았다. 옛날이야기는 허한 마음을 천천히 데워주는 아궁이 불 같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싹싹 긁어먹고 싶은 누룽지밥 같기도 했다.
사진 속 젊은이들은 누구일까? 그들과 나는 어떤 관계일까?
그들에게 나는 '선배'로 불리고 싶었다. 그게 내 대학시절 로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누나'라 불렀다. 가끔 '형'이라고도 불렀다. 우리는 대학 선후배 사이다. 철없던 시절 어울렸기에 감출 것도 없고, 포장할 것도 없는 사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연락이 끊긴 시간에 일어난 일들로 각자의 어깨는 가볍지 않아 보였다. 그 무게를 감지하였기에 서로 입조심을 했다. 무심코 꺼낸 말이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서로 직감했다. 해맑게 웃던 웃음 아래 깔린 그림자는 제법 안쓰러웠다. 선배랍시고 해줄 멋진 희망의 말을 찾지 못했다. 나 역시 헤매고 깨지고 까지는 삶을 사는 허당이었으므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철없던 시절, 그 겁 없이 까불며 살던 때 얘기만 도돌이표처럼 하며 웃는 게 최선이었다.
갑자기 궁금증이 생겼다. J와 Y에게 자주 듣던 그들의 친구, B군에 대한 것이었다. 참고로 난 B군을 본 적도, 스친 기억도 없다.
“근데 B는 왜 별명이 그래?”
나의 질문에 J와 Y는 한껏 신이 났다.
“걔 자취방에 가보고 너무 더러워서 그때부터 우리가 쓰레기라고 불렀지.”
“아~”
그렇게 지금은 애 셋 아빠인 '쓰레기' 얘기를 잠시 나눴다. 후배들과 헤어져 집에 오는 길에 다음 달 글감을 고민했다. 그때 머릿속에 '쓰레기'가 들어왔다. 뭉게뭉게 인간쓰레기를 탄생시켰다. 그 인간쓰레기가 내 소설 '핸섬 가이즈'의 주인공 '추정우'가 되어갔다. 다음 글은 추정우와 주변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재미난 제목도 떠올랐다.
다음날, 후배들과의 단톡방에 글을 올렸다.
“내가 이번에 소설을 쓰려고 하거든. 주인공 이름은 추정우. 별명은 쓰레기(쒸레기)야. 추정우와 친구들 얘기를 쓸 거야. 소설 속에 너희들 등장시켜 줄게. 너희 얘기 글로 써달라고 했잖아. 물론 소설이기에 너희 에피소드를 그냥 쓸 일은 없고 10% 정도? 아이디어만 넣으려고 해. 어때?동의함? 제목은 더티 가이즈.”
코믹소설 생각에 나는 잔뜩 신나 있었다. 하지만, 후배들은 평소와 달리 읽고도 반응이 없었다. 하루가 지나도 셋 중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초조하고 민망하고 소심해졌다. 제목이 마음에 걸렸나?그도 그럴 것이 40대 가장이자 회사 팀장들인데, '더티 가이즈'는 좀 심했던 모양이다. 책이 나와도 알리기도 민망하지 싶었다. 전략을 바꿔야 했다. 다시 톡을 남겼다.
“미안 미안. 핸섬 가이즈로 변경할게. 얼굴도 성격도, 모든 것이 완벽한 남자들 이야기로 해줄게. 어때?”
Y에게서 바로 반응이 왔다.
“좋아. 내 에피소드 마음대로 써도 돼. 이왕이면 나는 차도남으로 해줘.”
S에게서도 반응이 왔다.
“나는 뇌섹남.”
뒤늦게 J가 질문했다.
“그럼 나는?”
나는 고심했다.
“음. 너는 순정남이다.”
내가 아끼는 소설, 핸섬 가이즈 탄생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다. 자칫하면 '더티 가이즈'가 될 뻔했었다.
후배들의 외모는 아주 훌륭하지만(^^), 그럼에도 작가의 몰입을 고려할 때, 허구의 이미지가 필요했다.
“양세종, 김우빈, 하석진 중에서 골라 봐. 그래야 나도 기쁘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Y가 제일 먼저 골랐다. 내가 가장 큰 비중으로 생각한 연예인이었다.
“나는 양세종. 드라마 '사랑의 온도'에서 너무 좋았어.”
“캬아악! 역시.”
그렇게 Y가 나의 최애 캐릭터에 낙점되었다. 이후 S는 평소 자신의 이미지와 많이 다른 뇌가 똘똘한 '하석진'을 골랐다. 이상형이라면 소원을 들어줘야 했다. 뒤늦게 톡을 본 J는 남은 그를 골랐다.
“근데, 너무 부끄럽다. 내 입으로 김우빈을 고르다니.”
“인생 뭐 있냐? 뻔뻔하게 가는 거야. 기대해.”
후배들이 고른 연예인 이름과 그들의 이름을 적당히 버무려 소설 캐릭터 이름 셋을 완성했다.
뇌섹남 - 석진한.
차도남 - 온세종.
순정남 - 정우빈.
핸섬 가이즈 4명의 주인공 추정우, 석진한, 온세종, 정우빈은 그렇게 탄생했다. 참 재미있는 글쓰기죠?
지난번 글에 소설 '핸섬 가이즈'는 사람을 살리는 빅 프로젝트였다고 언급했다. 인생살이 힘겨운 40대 아저씨들에게 심폐소생술을 해 '그들을 살려낸 이야기'라는 의미였다. 애정을 듬뿍 담아, 뇌를 쥐어짜야 했던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현실의 고뇌를 잊게 할 인생세탁이었다. 후배들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훈훈한 젊은 날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테고, 작가인 나는 훈훈한 가공의 캐릭터들을 품에 안고 살아갈 테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시작할 때는 출간의 목적까지는 없었는데, 애착이 생겨 ISBN까지 발급받아 그들에게 책을 보냈다. 2024년 12월, 크리스마스 선물이자 인생 선물이 그들 손에 쥐어진 것이다. 선배의 선물은 제법 스케일이 컸다. (글 쓰는 작가님들 인정?)
각자 단란한 가정이 있는 후배들이기에 과거 팩트를 고스란히 쓸 수는 없었다. 와이프한테 등짝이라도 맞는 날에는 나까지 소환되어 조사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치밀한 작업이 필요했다. 그들이 어깨뿜뿜 할 수 있는 에피소드 한 스푼에 우리들만 알 수 있는 지명, 인물, 배경을 곳곳에 숨은 그림처럼 배치해야 했다. 아마 읽으면서 킥킥거렸을 것이다. 예를 들면 소설에 나오는 개 두 마리 이름에 그들의 이름을 따온다든지, 가족관계를 실제 인물로 설정한다든지, 놀러 간 장소를 우리만 아는 장소로 묘사하는 등 제법 세심히 작업했다. 쓰는 입장이나 읽는 입장에서 함께 즐거운 일이었다. 다른 독자들은 몰라도 우리끼리는 웃을 수 있었다. 소설은 나에게나 그들에게 달콤한 선물이 되었겠지?
책을 택배로 보내고 빨리 읽고 후기를 남기라고 닥달했다. 그들의 리액션은 어땠을까?
“필명이 백수광부가 뭐야? ㅋㅋㅋ."
"앉은자리에서 금방 다 읽었어. 너무 짧은 거 아니야?2편도 만들어 줘.”
“누나,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어?”
“오~ 와이프가 아직도 첫사랑 못 잊고 사냐고 놀려. 나보다 더 재밌게 읽은 듯.”
후배들의 격한 반응에 큰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함이 일었다. 그리고는 큰소리쳤다.
“책 잘 갖고 있어. 60년 후에 60억 가치가 있을지도 몰라.”
술 한잔 했는지 J가 밤에 톡방에 글을 남겼다. 울컥함이 올라왔다.
"내 기억에 누나는 솔직하고, 직설적이었지만 따뜻한 츤데레였어. 지금도 한결같아서 좋은, 친구 같은 누나지. 내 인생에 가장 좋았고 찬란했던 시절을 함께 만들어 준 누나, S형, Y. 잊지 못할 거야. 돌아갈 순 없겠지만 영원하길. 누나,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는 작가가 되길 바랄게."
글이 잘 안 써지는 날이면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글을 써보는 것도 좋다. 상대에게 바치는 글이라 생각하면 제법 잘 써진다. '핸섬 가이즈' 뿐만 아니라 나는 글(책) 선물을 자주 했다. 기획단계에서부터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썼다. 아이들에게도 썼고, 부모님과 시부모님께도 썼다. 우리 부모님께 나보다 더 잘하는 이종사촌 오빠 이야기도 소설로 써서 회갑연에 맞춰 준 적이 있다. 책은 특별한 날에 특별한 선물이 되었다. 창작의 원천은 결국 애정이었다.
평소에 그들에게 '두두두' 애정의 총알을 쏠 말주변은 없다. 대신 책을 통해, '다다다' 키보드 총알은 충분히 쏠 수 있다. 왜냐면 나는 글쟁이니까! 하하하!
핸섬 가이즈가 이 글을 읽지는 않겠지만, 그들에게 전한다.
"선배한테 잘해라! 그리고 너희들의 인생을 응원해!"
차마 후배들에게 말로는 하지 못해 글로 남긴 애정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우빈(J)인 전주 돌솥비빔밥 같은 애지. 인성, 외모, 성격, 공감 능력 등 좋은 게 색색이 다 들어있지. 또 얼마나 따뜻한지 밥을 다 먹을 때까지도 온기가 남아있지. 마음이 허한 사람들이 특히 우빈이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내 마음을 금세 알아차리고 알아주니까.”
“좋은 재료 다 넣어 비볐는데, 그것도 완벽해. 그 말이지?”
“진한(S)이는 순댓국에 소주 같은 애야.”
“진국이란 뜻? 그런 거지?”
“매사 단단한 척하지만 약해. 순댓국의 순대처럼 툭 건드리면 안에 있는 것이 다 튀어나와. 그 튀어나온 투명한 당면을 보고 있으면 속이 훤히 보여. 허세를 부리지만, 나는 그 찰랑거리는 눈망울과 미소를 쉽게 알아채지. 세상살이 힘들 때, 소주 한 병 들고 찾아가서 얘기하기 딱 좋은 애지. 국물이 진하고 얼큰한 게 끝내주지. 가끔 착해 빠져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세종(Y)은?”
“그는 오묘한 놈이지.”
“세종은 내가 말해도 되지? 그 애는 다크 초콜릿 같은 애지. 뒤에 숨겨놓고 나만 몰래 하나씩 꺼내먹고 싶은 다크 초콜릿. 진한 그 맛을 느끼다 보면 입가에 웃음도 나고 숨도 쉬어지고 그래. 행복감이 올라오지.”
“맞아. 세종은 아무한테나 정 주는 스타일은 아니고, 자기가 좋아하고 믿는 사람들한테 특히 잘하는 타입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