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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Oct 05. 2024

#24. 그리운 처음 사랑

오랜만의 여행이었다. 여행이란 말보다 출장이라는 말에 더 가슴이 뛰었다.


내가 좋아하는 코발트색 니트티와 블랙 진, 화이트 숏 패딩에 운동화를 신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검은색 롱패딩을 벗어던지니 아주 개운했다. 그레이 컬러 하프 패딩에 청바지, 백팩을 둘러맨 환한이의 기분도 가벼워 보였다.


낭만의 제주섬에 착륙했다. 공항의 야자수에 눈도장을 찍고 렌터카에 짐을 실었다. 2000년도 감성 음악을 들으며 해안도로를 달렸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도의 습기는 나를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달려도 달려도 바다인 제주를 사랑했다. 서준 아빠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가족여행 온 이후로 처음이었다. 제주의 바다, 파도, 바람, 돌, 꽃, 오름, 노을까지 내 두 눈에 한 장씩 한 장씩 담아 두었다. 어떻게 건축물과 엮어볼까도 간간이 생각하면서 말이다.


환한이가 점심 장소로 예약한 곳은 바다 바로 옆에 앉아서 닭 도가니탕을 먹을 수 있는 운치 있는 식당이었다. 추운 바닷바람에도 따뜻한 식사였다. 파도치는 소리를 들으며 뜨끈한 뚝배기 속 닭죽을 먹으니, 속이 편안해지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와~ 여기 진짜 맛있다.”

“와~ 여기 진짜 멋있다.”

이런 뻔한 말에도 감격스러웠다.    

 

“고마워. 화니.”

익살스럽게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부르는 것 오랜만이네.”

“그러게. 술 취할 때면 그렇게 불렀지.”


여행지에서만 생겨나는 용기였다. 나답지 않은 따뜻한 말이 나왔다.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든든한 식사 후, 커피 한 잔씩을 뽑아 들고 다시 달렸다. 독특한 화산석과 바위층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곳은 사계해변(沙溪海邊)이었다.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인해 생긴 크고 작은 구멍인 마린 포트홀이 이국적이었다.

마치 뭔가가 날아와 깊이 자국을 내고 달아난 느낌이었다. 황토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바위층에 마음을 빼앗겼다.   


“지형이 너무 멋있다. 파도에 깎여나가는 게 아쉽네.

나도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이 지형의 모양과 재질을 모티브로 사인 디자인 하면 좋을 것 같아."


“오호~ 느낌 좋다.”

“근데 건물 이름은 뭐야?”


“글쎄. 나중에 알려주겠지?”

“음. 영문이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환한이가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멀리 보이는 섬들과 주변 산들을 둘러보았다. 바닷물로 가로막힌 섬과 산은 가까이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애틋한 관계로 보였다. 달리 보니 바닷물이 이어주는 섬과 산은 가까이 가지 못해도 닿을 수 있는 그리운 관계 같기도 했다.

구체물을 보고 추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어른이 된 후 생긴 버릇이었다.     


자료조사를 위해 찾은 다음 장소는 미디어아트 전시관이었다.


“의뢰인이 1층 복합문화공간의 한 면을 미디어아트 전시패널로 꾸미고 싶어 해. 보면서 힐링하고 영감을 떠올리는 그런 공간으로 연출하고 싶어 해."

“근데, 네 의뢰인은 부자야? 미디어아트 패널까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네.”


클라이언트가 부자라는 게 나쁠 것은 없었다. 공사대금을 떼 먹히거나 가격을 후려칠 확률도 낮으니 말이다. 하지만 집에 뭘 이리 많이 투자하는지는 궁금증이 생기긴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참 많이 아끼나 보다는 생각만 미루어 짐작했다.

  

전시 공간 안은 화사했다. 제주의 사계절이 흩날리고 있었다. 내 마음에도 꽃잎이 날아다녔고 눈 송이도 흩날렸다. 꿈속을 걷고 있었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 잠시 쉬었다 갈까?”


분위기에 취한 너와 나는 진분홍색 꽃들이 수만 개 뿌려지는 패널 앞에 나란히 앉았다.


“어디 안 좋아?”


그가 물었다.


“아니, 너무 황홀해서 정신을 잃었을 뿐.”


다리를 쭉 뻗고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흰색 운동화에 내려앉는 꽃잎이 사랑스러웠다. 환한이도 내 옆으로 다가와 다리를 뻗고 앉았다. 우리는 꽃잎이 쏟아지는 그곳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디지털 미디어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끄집어내었다.



“학교 옆 코스모스길 기억나지?”

그가 물었다.


물론이지.”

나는 그 꽃밭으로 날아갔다.


“그때 서로 첫사랑 얘기했잖아.”

“맞아. 아직도 오글거리는 것 같아.


우리 둘은 '그때'를 공유했던 친구였다. 


그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말한 첫사랑 기억나?”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선풍기 같은 애?”

“와, 기억력 좋네.”  


“내가 흥미진진한 사랑 얘기는 기억을 잘해.”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혹시 생각 나?"

 

선풍기 그녀는

어느 날은 약풍.
어느 날은 강풍.
어느 날은 회전풍.

종잡을 순 없지만,

함께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라고 말했지."

"와! 다 기억하네."


"내가 기억력이 좋잖아."

"훗. 근데, 추리력은 기억력만 못 하네.”


“어?”

"단서가 참 많았는데."


환한이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알듯 말듯한 표정이었다.




“그 여인은 지금 잘 살고 있겠지?"



환한이의 처음 사랑이 나인 것 같은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를 좋아했던 것 같다. 아니 좋아했었다. 이성으로서 인지 친구로서 인지가 헷갈릴 즈음, 하연이가 그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쿨한 척 소개해주었다. 그러면서 내 감정의 씨앗을 싹 거둬들였지만, 나도 그를 분명 좋아했다. 그와 있으면 너무 편해서 이게 사랑은 아닐 거라 착각했을 뿐이다.


20대의 사랑이라고 하면 뭔가 대단히 요동치는 감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 아니라 친구라고만 정의했다. 그를 만나면 생기는 '두근거림'은 서둘러 '신남'으로 치환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가 떠난 쓸쓸함은 서둘러 다른 걸로 꽉꽉 눌러 틈 없이 채워버렸다.


나는 힘들 때면 그의 다정한 말에 기대고 싶었고 그의 위로가 그리웠다. 나에게도 그가 '처음 사랑'이었던 것 같다.           


결국은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 나도 네가 '처음 사랑'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진 못했다. 아련한 파도 영상이 두 켤레의 운동화를 적셨다. 한참을 노을빛에 물든 파도 영상을 바라보다가 그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잠시 눈을 감았다.


관람객의 소음 그 어떤 것들도 들리지 않았다. 20대의 나와 40대의 내가 오버랩되었다. 한참 지나서 눈을 떴고 입을 뗐다.


“20대의 나는 너랑 함께 걷고 싶었고 함께 얘기하고 싶었어. 내 얘기를 놓치지 않고 들어주는 네가 좋았어. 널 웃게 하려고 노력했어. 그리고 네 마음이 아플 때면 날 찾아주길 바랐어.


당시의 내 마음을 정의하면 뭐였을까?






*독자의 느낌(댓글)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시간되시는 분은 한 줄 느낌 부탁드려요~~ 다음 25화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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