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어. 나이가 마흔이 넘었지만 사실 사랑이란 것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없는 그의 행복도 내 사랑인지, 육체적인 교감 없는 정신적인 지지도 남녀 간의 사랑인지. 그것도 사랑이라면 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그는 내 말에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너 아직 순수하구나.”
환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를 당겨 주었고 나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가자."
자료조사의 마지막 코스는 수목원이었다. 제주의 식생과 꽃들을 살펴보고 건축물 뒷 정원의 조경컨셉을 잡아야 했다. 나는 그에게서 두 세발자국 뒤에서 걸었다. 동백꽃 사이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문득 40대 남자의 뒷모습에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20대에 내가 보았던 청년, 환한이의 뒷걸음과는 달랐다. 쓸쓸함을 머금은 그런 걸음걸이였다.
“와, 동백꽃 너무 예쁘다. 잠깐 서 봐.”
환한이가 나를 동백꽃 앞에 세웠다. 어떤 포즈도 어색하여 그냥 환하게 웃었다. 꽃이 원인이었고 환한 미소는 결과였다.
“건물 뒤 그림자 공간 말이야. 동백꽃으로 하는 게 어때?"
“동백? 잘 자랄까?"
"요즘은 지구 온난화 때문에 중부지방에서도 잘 자란다네."
"씁쓸하지만, 반가운 소리네."
"꽃이 그리울 가을 겨울에도 볼 수 있어서 동백이 더 좋은 것 같아."
"건물의 컨셉도 그리움이니까 잘 어울릴 것 같아."
환한이는 동백꽃밭에서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열심히 일만 하는 그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너도 뭔가 쓸쓸해 보여.'
“이제 숙소로 갈까?”
바로 뻗고 싶었지만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컨퍼런스 룸으로 갔다. 환한이가 오늘 나온 아이디어와 내용들을 정리하는 사이 나는 마당의 조경을 스케치했다. 피로가 몰려와 눈꺼풀이 절로 내려왔다.
“수민아, 너 먼저 올라가. 마무리 짓고 1시간 내로 갈게.”
“그래. 수고.”
“자지 말고 기다려.”
나는 객실로 올라가 씻고 잠시 침대에 누웠다. 눈을 떠보니 아침 6시였다.
'앗! 벌써?'
어제 환한이가 한 말이 생각나 급히 전화했다. 받지 않아서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졸린 눈의 환한이 문을 열어 주었다.
“미안. 어제 깜빡 잠들었나 봐.”
“어제 많이 피곤했지?"
"많이 걸었더니 그랬나 봐."
"들어와. 커피 하자."
"비몽사몽 같은데?”
"그러니까."
나는 커피를 마시러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채워진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가 놓여있었다. 그중 한 개만 입댄 흔적이 있었다.
“혼자 마신 거야?”
대답대신 그가 뒤에서 내 어깨를감싸 안았다. 그의 숨소리가 내 귀에 점점 크게 들렸고 그의 볼이 내 얼굴에 닿았다.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숨 막히는 공간에서 빠져나오려는 나를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나 아직 꿈속이야.”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는 소파로 나를 데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꿈속에 있을게. 조금만. 응?”
내 귓가에 속삭이곤 그는 이내 잠이 들었다. 알 수 없는 포근함이 나를 감싸 안았다. 나도 곧 노곤해졌고, 그의 꿈속에 초대받았다.
우리는 꿈속에서 발랄한 캠퍼스 커플이었다.
HH와의 이야기 #8. 일일주막, 일일커플
그날은 우리 과 일일주막을 하는 날이었어. 온갖 인맥을 동원해서 막걸리를 팔아야 했어. 부추전과 김치전을 구워 계속 상차림을 해야 했어. 과의 발전기금(술 마실 돈)을 만들기 위해 술을 팔아야 하는 이벤트 날이었지. 아침부터 앞치마를 두르고 무척이나 바빴어. 무표정으로 부추전을 굽고 있는 나에게 친구가 귓속말로 속삭였어.
"야, 개과(계과) 선배들이야. 조심해."
그때 교양수업을 같이 들어서 얼굴만 알고 있던 '기계공학과 미친개'가 나타났어.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한 덩치도 성격도 우락부락한 선배였지. 외모가 즐겨보던 만화,슬램덩크 속 산왕공고의 신현철과 흡사했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주량이 엄청나서 매상에는 아주 도움이 되는 고객이라는 점이었지. 미친개는 친구 2명과 함께 자리를 잡았고 나를 쳐다보며 주문을 했어.
"막걸리 일 병, 파전 일 접시, 김치전 일 접시, 종이컵은 네 개(네게~ 후)"
"네~ 금방 해드릴게요."
'저 마지막 제스처는 뭐야? 느끼하게.'
나는 전을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내어갔지. 그랬더니 미친개가 덥석 나에게 말했어.
"백수민. 한잔 할래?"
"어!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내가 너 찍었거든."
"예???"
이건 무슨 개똥 같은 소리인지 앞이 캄캄했어. 미친개가 나를 물다니 이건 그 어떤 고백보다 무시무시한 사망선고 같은 것이었어. 그것도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이야. 그 순간 나는 어쩔 수가 없었어. 지체할 시간이 없었지.
"아, 근데 저 사귀는 사람 있어요."
"하하하. 한번 튕기는 건 봐줄게. 은근히 귀엽네."
'아, 씨. 이거 뭐야?'
나는 일단 후퇴했고 화장실로 달려갔어. 그리곤 너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어.
"야, 도와줄 거지? 너밖에 없어."
"나도 그 개과 선배 무서워. 어떡해? 히히."
"야! 너 진짜! 이 상황에 웃음이 나지?"
"어. 지금 네 모습이 그려져서 웃겨 죽겠어."
"성공하면 밥 사줄게."
"너무 약해. 목숨을 담보로 하는 건데."
"밥에다가 술 얹어서. 어때?"
"뭔가 22% 아쉬운 느낌이다."
"까짓것. 밥에 술에 노래방, 오락실까지. 됐냐?"
"오~~~~~~~~~~~풀코스! 좋아."
"진짜지? 그 선배 앞에서 얼버무리거나 혼자 도망가면 안 돼! 알지?"
"미친개와 너 중 누가 더 무서울까? 흠..."
"몰라서 물어?"
"아무래도 너한테 맞아 죽는 편이 더 타격이 클 거야. 그치?"
"역시 잘 알고 있군."
"근데 이거 드라마에서 많이 본 뻔한 상황설정 아니야? 그 선배가 믿겠어?"
"그러니까 조금 세게 나가야 해.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뭘 어쩌려고?"
"여하튼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 문자하면 바로 와."
그렇게 나는 너에게 일일커플을 하자고 지시하고 매달렸어.
미친개는 주막이 끝날 때까지 가지 않고 막걸리를 5병째 마시고 그 자리에 죽치고 앉아 있었어. 힐끔힐끔 나를 보며 웃는 모습이 아주 꼴 보기가 싫었지. 다른 과 주막들은 철수 중이었고 우리도 천막 정리를 해야 했어. 근데 미친개가 자리를 뜨지 않고 있으니, 친구들은 내가 어떻게든 미친개를 처리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어. 나는 너에게 몰래 문자를 했어.
"SOS"
나는 초조하게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언덕 아래에서 서서히 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어. 성큼성큼 네가 나에게 걸어올 때 나도 너도 떨고 있었어. 상기된 너의 표정에서 나는 읽을 수 있었지. 너도 지금 아주 큰 용기를 내고 있단 걸 말이야. 나는 이때다 싶어 미친개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어.
"얘들아, 남자친구가 데리러 와서 먼저 가볼게. 내일 봐."
그러고는 냅다 너에게 달려가 팔짱을 끼었지. 아주 발랄하고 상큼한 여자친구처럼 말이야. 그때 미친개는 너를 무섭게 쳐다보았어.
"너, 무슨 과 몇 학년이야? 진짜 수민이 남자친구야?"
'쫄지 마. 제발. 이환한 정신 차려.'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해야 내가 산다며 너에게 구원의 눈빛을 날렸어. 머뭇거리는 네가 선배 앞에 무릎 꿇기 전에 너의 입을 막아 버려야 하나 별 생각을 다했지.
'이환한은 서태웅이다. 슬램덩크 11번, 서태웅이다.'
주문을 외우며 확 뽀뽀를 해버릴까라는 생각까지 했지.난 아주 다급했거든.
미친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는 너를 더욱 무섭게 째려보았어. 그때 너는 생글생글 웃으며 미친개에게 조심스레 다가갔어.
"형님~"
'형님? 이 자식이~~ 날 배신해?'
"이거요."
너는 가방에서 꺼낸 검은 봉지에 싸인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어. 그리고는 내 손을 꽉 잡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