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문도 모른 채 너에게 이끌려 무작정 달렸어. 한참을 달려 겨우 정문 앞 공대 건물 뒤에 몸을 숨겼어. 그리곤 맥박이 안정될 때까지 계단에 퍼질러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어.
"헥헥. 야. 너 뭐야?"
"뭐긴 뭐야? 도망친 거지."
"아휴. 이게 최선이었냐? 근데, 검은 봉지는 또 뭐야?"
"지금쯤 그 미친개 이리저리 날뛰고 있을 거다."
"거기 뭐가 들었는데?"
"시원한 생수."
"왜?"
"냉수 마시고 꿈 깨라고."
"뭐? 와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나 근데 내일부터 어쩌냐? 같은 건물 쓰는데..."
"그러게. 신변보호신청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키키킥"
"난 이제 죽었다. 확 군대나 가버릴까?"
"미안하다. 내가 너무 매력적이라."
"음. 그렇다면 너도 이거 마셔."
네가 가방에서 꺼낸 것도 검은 봉지 안에 싸여있었지.
"이것도 생수야? 정신 차리라고?"
꺼내보니 내가 좋아하는 탄산, 칠성 사이다였어.
"아니. 개운해지라고. 하루 종일 기름냄새 맡았잖아."
그때 난 너의 세심함에 살짝 설렜어.
'내 마음을 꿰뚫고 있어.'
그날 너와 나는 잠시잠깐커플이었어.
대부도에서 건물 착공식이 조촐하게 있는 날이었다. 나도 초대받아 아침부터 분주하게 준비했다.
“어디야?”
“제시간에 못 갈 것 같아.”
"천천히 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들이 모두 간 후였다. 환한이가 명함 하나를 건넸다.
“궁금한 것 있으면 이메일 보내래.”
"의뢰인?"
환한이가 건넨 서 과장 명함을 챙긴 후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갔다. 제주도 다녀온 이후로 우리는 좀 더 가까워졌다. 우리의 일은 골조부터 탄탄히 쌓아 올라갔고 우리의 관계도 깊은 내면에서부터 신뢰와 지지를 기반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라갔다.
공사상황이 궁금해서 환한이에게 전화했다.
“바빠?"
"무지 바쁘네. 언제 올 거야?”
“당분간 못 갈 것 같은데. 근데 서 과장님은 메일에 답이 없네."
"미국 병원 가셨대."
"그래? 국내에선 치료가 힘들대?"
“까다로운 케이스인가 봐."
“누구 하나 쉬운 인생은 없네.”
40년 살아온 경험에서 나오는 진리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서 과장 컨펌 없이 복합 문화공간의 컨셉부터 마감재, 가구, 오브제, 책과 음반, 미디어 아트에 담길 문학작품 및 영화 컨텐츠까지 꼼꼼하게 챙겨서 환한이에게 넘겨주었다. 공사는 완공일을 향해 차질 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글쓰기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쓰다 보니 힐링이 되고 재미도 있었다. 겁도 없이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 아웃라인을 잡아보았다.
제목 : 스크래치 페이퍼
뭉게뭉게 하늘로 떠오르는 무지개 풍선들. 희망찬 삶을 꿈꾸던 그녀에게 갑자기 드리운 먹구름. 온통 시커먼 색으로 덮여버린 그녀의 삶. 쏟아지는 빗 속에 침몰.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그녀. 검은색 스크래치 페이퍼에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는 그녀. 검은 구름이 사라지고 서서히 드러나는 무지갯빛 희망.
소설을 쓰면서 나는 자꾸 작품 속 화자가 되었다. 자주 그렇게 되어 버렸다. 나를 그녀의 삶과 말에 투영시켰다. 대리 인생을 사는 느낌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감상에 젖기 일쑤였고 갑자기 소설 속 주인공처럼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소설 잘 써져?”
환한이에게 톡이 왔다.
“아니. 어려워.”
“호수로 바람 쐬러 갈까?”
“좋지.”
나는 내가 쓰는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하얀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갔다. 호수의 바람에 느끼며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뇌에 뿌리는 산소는 속이 뻥 뚫리는 탄산의 맛이었다.
어둠이 깔린 후, 분수 앞 벤치에 앉았다.
"한 번 들어봐."
이어폰 한쪽을 귀에 끼었다. 첫 기타 음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좋아해.”
“나도 알아.”
온몸을 휘감는 영화 OST가 흐르고 있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봤지만, 볼 때마다 눈물이 고이고 심장이 내려앉는 영화였다. 20대 초반에 내가 취해 있던 영화였다.
“그때 너 만나기만 하면 이 영화 얘기만 했었잖아.”
“그랬지."
그때 나는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염색도 했었다.
"너 그때 살짝 아오이 느낌 있었어."
"네가 닮았다고 해서 나 진짜인 줄 알고 좋아했잖아."
"거짓말 한 건 아닌데."
"후~ 첫사랑을 못 잊는 준세이 너무 아렸어."
"아오이도잊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지."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고 호수의 물은 찰랑거리고 물 위에 내려앉은 조명은 감미로웠다.
“사실, 대부도에서 너 만나기 전부터 네 생각 종종 났었어.”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배달 알바를 한 적이 있는데,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너랑 비슷한 사람을 봤어."
“그래? 지하 주차장?"
"응. 그때부터 옛날 생각 종종 했어."
"내가 지하 주차장 간 적이 있었나? 흠..."
잠시 생각에 빠진 너는 이내 나에게 물었다.
"혹시 군의동 H아파트?"
“어! 어떻게 알았어?”
“그럼 혹시 그날 배달한 음식은 뭐였어? 혹시대게는 아니지?”
“어. 대게 맞는데”
환한이가 막 웃었다.
“그럼 네가 본 사람 나 맞나 봐."
“어?”
“거기 우리 동생네야."
"진짜? 동생?환희였나?"
"응.대게에술 한잔 하려고 놀러 갔다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간 적 있었는데."
"어! 정말?"
"지하 주차장에서 나 봤으면 그때 봤나 보네."
"혹시 환희차가 Shining star라고 스티커 붙어있는 미니쿠페야?"
"어, 맞아!"
군의동 H아파트는 환한이의 동생 환희네 집이었고 대리운전을 하며 만난 불륜녀, 별은 환희의 부인이었다. 찜찜했던 그간의 의문은 풀렸다.
내가 그렇다고 믿는 순간, 모든 것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어 있었나 보다.나는 어쩌면 예전부터 이걸 아주 잘 해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 둘은 음악을 들으며 호수를 바라보았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뭔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영화제목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냉정해 보이지만 열정이 가득한, 열정으로 가득하지만, 냉정을 잃지 않는 그런 삶과 사랑, 그 어디쯤에 내가 있는 걸까?
묵직하면서 떨리는 첼로 곡이 흐르자, 나는 눈을 감았다. 떨리는 첫 키스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두 남녀 주인공이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감정을 끄집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서툰 첼로 연주자가 떨리는 손으로 활을 현에 갖다 대었다. 서툴게 다가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떨리는 활과 현의 만남, 그 장면을 상상하는 순간 나에게도 미세하게 떨리는 활이 와닿았다. 그와 나도 영화 속 그들처럼 어느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