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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Oct 11. 2024

#28. 미련한 사랑

*소설입니다



전화벨이 울렸다. 갑자기 사라진 나를 찾는 환한이의 전화였다.


“어디야?”

“잠깐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말도 없이 사라져서 걱정했네.”

“미안.”


“무슨 일 있어?”

아니야. 준공식 끝났어?”


“어. 다들 갔어. 와서 밥 먹자.”


혼자 있고 싶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MMJ로 향했다. 마무리할 것도 있고 챙겨 올 것도 있었다. 건물에 들어서서 찬찬히 훑어보니 하나하나 내 취향이었다. 뭔가 지릿한 것이 내 몸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1층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환한이가 행사팀들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가구들을 원래 자리로 재배치하고 있었다.


“왔네.”

“잘 끝났어?”


“홀가분 그 자체다. 준공식까지 챙긴 건 처음이야."

"너 정말 고생 많았어."


"근데 너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아니야. 조금 더워서 그런가 봐."


그는 얼음이 들어간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만들어 테이블로 가져왔다. 그러고는 미디어 아트 패널의 전원을 켰다.


“너 나간 후에 플레이된 거라 못 봤지?"

"뭔데?"


"준공식 특별 영상. 너니까 특별히 다시 보기 해주는 거야.”


잔잔한 음악과 함께 떠오른 첫 장면.

그 첫 장면에 숨이 멎었다.

흑백처리된 서준 아빠의 뒷모습.

내 남자였던 김민우의 실루엣.


그는 누군가의 그리움이었다.


이내 분홍색 꽃잎이 상단에서 아련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꽃잎과 어우러지는 정갈한 서체의 텍스트들이 한 줄씩 나타나고 있었다.   


<미련한 사랑>

미안해요.
내가 너무 사랑해서.
그리워요.
당신의 그림자조차도.

미안해요.
원한 적 없는 당신을 붙잡아서.
그리워요.
당신의 뿌리치는 손길조차도.

미안해요.
돌아가지 못하게 매달려서.
보고파요.
먼 하늘이라 닿을 수 없는 지금도.

미련하죠.
당신을 이렇게 잃고 나서야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달아서.
결국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아서.



영상은 끝이 났다. 내 눈에 무언가가 글썽글썽. 톡 건드리기만 하면 주르르 뭔가 흐를 것 같았다.


“어때?”

“흠.. 시가 참 슬프네. 아니,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서 과장이 직접 쓴 원고야. 영상작업은 내가 했고."

"나 잠시만."


눈시울이 뜨거워져 밖으로 뛰쳐나왔다. 바다를 보며 털썩 주저앉았다. 잔잔한 바닷바람이 내 열기를 조금씩 식혀주었다.      


‘당신에게 그 여자는 바람이었나 봐. 지친 당신에게 불어오는 한여름 밤의 산들바람. 땀이 열을 안고 증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바람.’  


땀을 날려 버리고 정갈한 너로 다시 돌아오려고 한 너를, 그 시간조차 견디지 못한 내 못난 사랑이 부끄러웠다. 남편에 대한 원망. 이제 보니 그리움이었다. 그걸 깨닫는 데 참으로 오래 걸렸다.  



"왜 그랬어? 왜! 왜! 흑흑."


그를 향한 것인지.

나를 향한 것인지.


마침, 여름날의 장대비가 마구 쏟아졌다.

빗물에 눈물을 가릴 수 있어 좋았다.

빗소리에 흐느낌을 숨길 수 있어 좋았다.

퍼붓는 비를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저 하늘의 미움을 산 것인지.

저 성난 하늘에게 용서를 받는 중인지.


하늘은 그렇게 잔인하게도 나에게 퍼부어댔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정신이 들어?”

“어떻게 된 거야?”


“바닷가에 쓰러져 있었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니야. 아무것도."


감당하지 못할 슬픔에 모래사장에 쓰러진 것이었다. 눈은 떴지만, 힘이 하나도 없었다.


“수액 들어가고 있으니 좀 더 자. 얼굴이 너무 안 좋아.”

"그래. 고마워."


나는 눈을 감았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민우 씨 꿈을 꾸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남자다운 그 모습에 반했다. 그와 결혼할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었다. 서준이를 낳고 우리는 미래를 함께 꿈꿨다. 그러다가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현실에 한탄하며 그에 대한 비난도 시작되었다. 민우 씨가 힘들어하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더 힘들다며 그의 힘듦에 눈을 감았다.


그의 힘듦은 나약함이라고 외면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으로 치달았고 나는 그를 놓아버렸다. 놓아버린 손은 다시 잡을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렸다. 아무리 가까이 가려해도 멀어져만 가는 그의 모습을 하염없이 쫓아가다 잠에서 깼다.


주변을 둘러보니 소파에 환한이가 잠들어 있었다. 주섬주섬 젖은 내 옷가지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먼저 가서 미안. 나 기다리지 마.”


쪽지를 남겼다. 이런 복잡한 심경을 환한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의 고요가 찾아올 때까지 나는 환한이의 연락을 받지도 하지도 않았다.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미련하게 나는 또 그러고 있었다.


환한이가 MMJ 1층에 와서 책도 보고 글도 쓰라고 문자를 보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그곳은 나에게 편한 공간이 아니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한 걸음 나아가면 한 걸음 무너질 일이 생겼다.

마음이 가벼워질만하면 무거워질 일이 생겼다.


머릿속을 뒤엉키게 만드는 많은 일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서준 아빠, 나는 행복해지면 안 되는 여자인가 봐.'


나는 또다시 눈을 감고 숨 고르기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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