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수광부 Oct 15. 2024

#30. 첫 번째 사연

*소설입니다.




"첫 번째 사연입니다. 가을 낙엽처럼 아련하네요."

환한이가 노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면 떠올라.

도서관에서 처음 본 순간.
달빛아래 벤치에서 나에게 기대 잠든 시간.
휴대폰이 깨졌어도 너만 있으면 깔깔 웃었던 추억.
눈 내리던 크리스마스날 편의점 테라스에서의 낭만.
내가 사준 털모자를 덥석 쓰고 웃는 친구.
첼로의 숨결을 느끼는 여인.

코스모스가 피는 가을날이면
몹시 그리웠던 나의 첫사랑.

다시 만난 날,
바스락거리는 낙엽처럼
위태로운 모습을 한 그녀.
웃게 하고 싶었어.

흠뻑 젖어있던 널,
영혼마저 축 늘어져
위태로운 너를 살리려고
업고 달렸어.

더 이상 다치지 않기를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기도하고 기다렸어.

그토록 기다렸던 그녀가
지금 내 앞에 있어.
이제, 나 어떡하면 될까?
 


사연 속 그녀는 마음이 글썽거렸다. 그를 처음 만났던 대학교 도서관 열람실을 떠올렸다. 그가 남긴 쪽지를 떠올렸다.


"지나치기 힘든 인연이 있습니다."


정말 나와 그는 하늘이 기다란 실로 연결해 놓은 것이었을까?

돌고 돌아 결국 여기까지 온 것일까?


20대 그와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눈을 감았다. 울긋불긋한 가을 낙엽이 바람에 샤라락 흩날리다가 우리의 마지막 그날에 멈춰 섰다. 




 HH와의 이야기 
 #9. 각자의 길 


와 하연이가 이별을 하고 우리 셋은 서로서로 어색해졌어. 함께 하지 못하고 따로 다녔지. 우리 셋은 헤어진 거야. 추억들도 일상도 회색빛으로 변해갔어. 아마 모두 외롭고 힘들었을 거야. 


중간고사 마지막 날, 전공 시험을 망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어. 아침부터 내릴 것 같았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 시간이 지나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도서관 내 휴게실로 달려갔어.


누군가 읽다 두고 간 교차로(생활정보지)를 한 움큼 집어 왔어. 가려지지도 않는 작은 크기의 신문지를 머리에 덮어쓰고 뛰기 시작했어. 세찬 빗줄기에 금세 신문지가 너덜너덜 해졌어.


'약해 빠졌어.'


신문지 우산은 빗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푹푹 찢어지면서 바닥에 떨어졌어. 꼭 그때의 내 모습 같았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예상된 비 소식에도 우산을 챙기지 않았고, 친구 커플의 이별이 모두 내 잘못 같았어. 앞길이 보이지 않는 미래가 무서웠고 함께 할 우정이 사라져서 캄캄했어.


20대의 ' 것의 눈물'흘러내렸어. 

모든 게 속상했어.


바닥에 떨어진 신문지를 버리고 가지도 못했어. 찢어지고 흐물거리던 그것들을 줍기 시작했어. 그러는 동안 옷과 가방, 내 마음까지 다 젖어버렸어. 서러움에 울음이 터져 버렸지. 


겨우 젖은 신문지 뭉치를 주워 들고 고개를 들었을 때, 너와 눈이 마주쳤지. 너는 교내버스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었어.


한 걸음 가까이 오려던 너는 눈물과 빗물이 범벅이 된 나의 얼굴을 보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어.


우린 사귄 적도, 헤어진 적도 없는데 사랑하다 헤어진 연인 같았어.


끝내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각자의 길을 갔어.


는 차마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을 테고 나는 차마 너에게 기대지 못했을 거야.


그땐 그랬어.





숨을 고르고 감은 눈을 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뭉게구름처럼 포근했다. 갑자기 그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수줍은 듯 그는 머리카락을 빗어 올렸다.


그가 나에게 걸어왔다.

그때 유난히 반짝이는 빛줄기가 우리 둘을 비추었다.


'서준 아빠, 나란 여자, 다시 웃어도 될까?'   



<에필로그>


 HH의 일기 

#1. 내가 환하게 웃었던 이유


결국 하연이가 헤어지자고 했다.


"너 진짜 남자답지 못한 거 알아?"

"무슨 소리야?"


"솔직하지도 못하고 용기도 없고."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하연이가 또 싸움을 걸어 올 참이라 생각했다.


"난 네가 엄청 밝고 세심한 사람인 줄 알았어."

"..."


"근데, 아니더라."

"넌 내가 늘 못 마땅하지?"


"넌 조건부 친절이었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는 몰랐겠지. 우리 둘만의 데이트는 늘 어색하고 삐그덕 댔어. 하지만."

"흐음..."


"수민이와 셋이 되면 분위기는 달랐어. 그때만 너는 밝고 다정한 사람이었어."

"괜한 트집 잡지 마."


"넌 몰랐겠지? 그러니 나랑 사귀고 있겠지? 바보같이."

"..."


"버려줄게. 화끈하게."

"야!"


"내가 찬 거야! 죄책감 따윈 지 마. 그럼 넌 오버하는 거야."

"..."


" 병신쪼다 새끼. 잘 가라."

"..."


하연이가 떠난 자리에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그게 사실이었다.



이유는 없었어.
그냥 너와 함께 웃고 있으면 좋았어.

이유를 몰랐어.
너를 챙겨 주면 내 하루가 평온했어.

그래서 그랬을 뿐.

그녀와 헤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네가 그리워.

보고 싶다.
웃고 싶다.
보고 싶다.


하연이와 헤어진 후 나는 수민이어색해졌다. 수민이를 피했고, 나도 수민이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어느 날, 교내 버스 정류장에서 수민이보았다. 세찬 비에 젖은 채 울고 있던 그녀말이다.


혹시나 하고 큰 우산을 들고 기다렸었기에, 당장 달려가 씌워주고 싶었지만, 의 눈빛은 날 허락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이제 우리, 친구로 안 되는 걸까?'



 

** 지금까지 소설 '스크래치 페이퍼'를 사랑해 주신 독자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매일이 편안한 가을날 되시기 바랍니다.



** 제가 지난 밤에 연재북을 선택하지 않고 글을 올렸네요. 바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올리고 지난 글을 삭제합니다. 라이킷 많이 눌러주셨는데 너무 죄송합니다.




이전 29화 #29. MMJ로 모여든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