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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Oct 12. 2024

#29. MMJ로 모여든 사람들

*소설입니다.


휘몰아치던 여름도 지나갔다. 10월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내 마음도 잔잔함을 되찾아 갔다. 아들 서준이는 오늘 하루도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갔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삶이었다.


진하게 원두커피 한 잔을 내려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하나하나 뱉어내고 나면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글쓰기앱에 올린 내 글에 공감해 주는 이가 생겼다. 그건 소소하지만 큰 행복이었다. 글쓰기가 나의 취미가 되었다. 글로 만나는 다른 사람들도 힘들어했다. 아파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었다. 나도 그들처럼 힘을 내고 싶었다.



 

9월부터 알바가 아닌 일을 시작했다. 명함이 있는 일이었다. 아이 낳고 그만둔 조경회사 대표와 연락이 닿아 다시 일하게 되었다. MMJ가 건축잡지에 실리면서 거기서 일한 이력이 재취업에 도움이 되었다. 대표는 내 가능성과 열정을 다시 믿어 주었다. 작은 정원을 꾸며주는 일에서부터 대형 건축물의 공간 디자인까지 다양한 일을 했다.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클라이언트 미팅이 있어서 가는 길에 휴대폰 스케줄러에서 알람이 떴다. 내일이 10월 25일임을 알려주었다. 그날이었다.   




이른 아침, 꽃시장에 갔다. 화사하고 싱싱한 꽃들을 한 아름 사서 집으로 왔다. 한 송이, 두 송이 골라서 한 다발을 만들었다. 고이 차에 싣고는 그곳으로 향했다.


‘당신 오늘 거기에 있을 것 같아.’


서준 아빠 기일에 그가 묻혀있는 곳이 아닌 대부도 MMJ로 향했다. 오늘은 그가 거기로 올 것 같았다. 그곳으로 향하는데 하늘이 너무 맑았다. 구름은 온화했다.


MMJ 근처 바다에 차를 대고 내렸다. 바다를 거닐며 나는 그에게 마음의 편지를 써내려 갔다.



여기야. 당신이 그리던 집. 우리 가족 셋이 함께 살고 싶어 했던 집. 이렇게 멋지게 완성이 되었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바다 향기가 한가득 들어오는 곳이지. 하루를 살아내고 지칠 때면 동백꽃 향기에 취해도 좋아. 뒤뜰에 가서 쉬어. 내가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을게. 가족들을 위해 돈 벌고, 치열하게 사느라 고생 많았지? 당신 덕에 나는 새 아파트에도 살아보고 이렇게 멋진 바닷가 집도 지어보고. 고마워. 이제 편히 쉬어.
   


남편이 서민재에게 말한 미래의 우리 집, 그 집을 완성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여러 사람이 다치고 찢기고 슬펐다.


그래도 결국 그들은 약속은 지켰다.


남편은 아내를 위한 집을 완성했고

그녀는 그가 의뢰한 집을 완성했다.


이제 나만 약속을 지키면 되는 걸까?


행복하게 살자는 그 약속.




용기를 내어 MMJ 1층 문을 열었다. 책장에는 소설, 시, 수필 등 다양한 책들이 가득했다. 젊은 연인은 책 한 권을 함께 읽으며 그윽하게 사랑하였다. 노부부는  책을 펴놓고 필사를 하며 흐뭇해하셨다. 어린아이들은 비치된 스크래치 페이퍼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덧칠된 검은 면에 선을 그을 때마다 속살을 드러내는 무지개가 예뻤다. 긁을 때마다 생기는 검은색 찌꺼기를 정리하는 작은 손이 기특했다. 모두들 평온한 모습이었다.


소유는 아니지만 

내가 원한 그대로였다.


그랜드 피아노 옆에 있는 테이블에 꽃다발을 올려두고 책이 있는 책장으로 갔다. 한참을 서성이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골라 자리로 돌아왔다. 꽃다발 옆에 노란 접착식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잠깐 시간 될까?”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환한이가 내 자리에 붙여놓은 쪽지가 떠올라 나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에게로 다가가니 그는 따뜻한 머그잔을 건넸다. 그 잔을 받아 들고 뒤뜰로 나갔다.


“동백 향 좋다. 커피 향도 좋고.”

"좋아 보이네.”


“넌 여기 어쩐 일이야?”

“서 과장이 나한테 여기 맡기고 갔어.”


"아... 그랬구나. 떠나면서 남긴 말은 없어?"

"글쎄. 언제 돌아올지는 모른다고."


"그 여자에 대해서 아는 거 있어?"

"왜? 서 과장에 대해서 왜 자꾸 물어?"


"아니. 그냥 뭔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것 같아서."

"혼자라고 하더라고. 어릴 때도 부모 없이 혼자 자랐고 커서도 그렇고."


"외로웠겠네. 많이."

"흠... 그래 보이지? 사랑하는 남자가 죽은 것 같아."


남편의 그녀가 한국을 떠났다. 마음에 품었던 남자가 아내를 위해 짓고 싶다던 집을 지어놓고는 훌쩍 떠났다.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을 욕심낸 죄였을까? 그를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건강을 잃어갈 만큼 아파했다.


그녀의 사랑은 지독스러웠다. 병들어가는 순간에도 그녀의 모든 에너지는 그를 향해 있었다.  지독스러움이 존경스럽다고 느껴질까?


남편을 향한 아내의 사랑보다 더 깊은 그녀의 사랑 앞에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머그컵의 온기가 다 사라질 때까지도 나는 아직 사랑의 실체가 어떤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오늘, 작은 음악회 있는 날이야.”

“그런 것도 해?”


“나 좀 스위트한 남자거든.”

“그런가? 훗.”


환한이는 1층 공간과 뒤뜰이 하나가 되도록 유리문을 개방했다. 그러곤 나를 남겨둔 채 피아노 옆으로 가서 마이크를 들었다.


“오늘 음악회 있는 날인 거 아시죠?”

“네~”


자주 와본 손님들인지 서로 아주 친숙해 보였다.


“그리운 이에게 시를 낭송해도 좋고, 사랑하는 이에게 피아노 연주를 해주어도 좋습니다. 신청곡도 틀어드립니다. 고백하실 분 고백하셔도 됩니다. 저희는 아날로그 감성을 사랑합니다.


차분하게 할 말을 하고 나서 환한이는 내게로 왔다.


“너 제법이다.”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곡이 10분을 채울 무렵, 환한이는 속속들이 도착하는 쪽지들을 보면서 흐뭇해했다.


나 역시 그 사연들이 아주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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