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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Oct 04. 2024

#23. 우리는 이제 한 팀

*소설입니다.




“넌 요즘 뭐 하며 지내?”

“이런저런 알바 좀 하고 애도 보고. 취미로 글도 좀 쓰고. 그래.”


“어떤 글? 나도 좀 보여줘.”

“에이, 나중에.”


무언가 번듯한 것이 없는 내 일상에 부끄러움이 일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같은 대학을 나온 대등한 관계였지만 지금은 갭이 커진 것 같은 사회적 위치에 주눅이 들었다. 대학 시절, 나 수민은 누구의 부인, 누구의 엄마에 만족하며 살 거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제대로 못 하는 초라한 모습처럼 느껴졌다. 여러 가지 상황 핑계를 대보기도 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의 이 마음을 너는 알아차린 듯했다.


"수민아, 나 좀 도와줘."

"뭘?"


"내가 지금 짓는 건축물의 조경, 네가 해보면 어때?"

“내가?”


“너 조경 전공이잖아. 건축이랑 인테리어 공부도 좀 했고.”

“그렇긴 하지만. 손 뗀 지가 언젠데?”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미 가슴이 뛰고 있었다. 나도 결혼 전에는 잘 나가던 조경회사 팀장이었다. 회사에서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자였다. 최연소 팀장으로 경쟁사에서 스카웃 제의도 자주 받았었다.    


"제발. 너밖에 없어."


환한이가 본인의 필살기인 불쌍한 고양이 눈빛을 하곤 나를 쳐다보았다. 예전부터 그 눈빛만은 거부할 수 없었다.


의뢰인이 슬슬 공사를 했으면 해서. 근데 아직 도면 작업이 좀 남았거든."

"빠듯하겠네."


"내가 세부도면 칠 동안 네가 조경이랑 내·외부 마감재 등 아이디어 내주면 안 될까?"

“도와주는 정도는 해줄 수 있지만.”


“해주는 거지?”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대충 하지 않을 거란 걸 환한이는 알고 있었을 거다. 예전부터 공모전이나 과제를 시작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는 가벼워진 얼굴로, 나는 무거워진 얼굴로 사무실돌아왔다. 환한이는 간이식 침대로 가며 내게 말했다.


"나 딱 10분만 자고 데려다줄게."


그러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손목에 늘 끼고 다니던 고무줄로 머리카락을 질끈 묶었다. 책상 여기저기 쌓여있는 도면들을 보니 젊은 시절 열정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결혼 전에는 하루하루 참 치열하게 살았는데.’


식어버린 커피포트에 물을 채우고 버튼을 눌렀다. 물이 끓어오르는 동안 건축 도면과 참고 서적들, 잡지들, 의뢰인 요구사항이 적힌 이메일 프린트까지 싹 챙겼다. 무거운 서류더미들을 들고 회의용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긴 테이크아웃 커피 컵에 드립커피 한 잔을 내려 자리로 가져왔다. 예전 직장인이었을 때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도면을 꼼꼼히 살폈다.


<건축 컨셉>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행복한 공간이자 그리움의 공간.

<디자인 모티브>
내 곁에 머무는 구름이자
내 곁에서 떠나가는 구름.


나는 내가 정리해야 할 마감과 조경에 관련된 부분을 특히 자세히 보았다.


<마감과 조경 요구사항>
1> 일몰 시 건축물의 그림자가 생기는 공간에 그네 의자를 설치할 것. 그곳에 별도의 조경 연출할 것.
2> 내부 마감재는 콘크리트는 최대한 배제하고 인공적인 소재는 최소화할 것.
3> 외부 조경은 나무와 돌 등 자연소재를 활용하여 최대한 친자연적으로 연출할 것.


의뢰인이 건축설계 하시는 분이라더니 요구사항이 상당히 꼼꼼하고 구체적이었다. 건강을 잃어가는 그분의 '사랑하는 여인과의 행복과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한 재료로 무엇이 좋을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미 사무실 벽시계는 새벽 12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12월 25일 크리스마스였다. 서준이가 어렸을 때는 남편과 나는 이 시각이 되면 서준이 침대 옆에 선물을 두고 몰래 나왔다. 안방에서 와인 한 잔씩을 나누며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잠이 들곤 했다. 이제 중학생이 된 아이는 엄마가 자정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도 별다른 연락도 없었다. 겨우 콜택시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쪽지 한 장 남겨두고.


“해피 크리스마스. 이제부터는 좋은 일만 가득할 거야. 너도, 나도."      




2023년 1월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해가 오면 항상 마음을 다잡는다.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한 한 해가 되기를 말이다. 새해 아침은 서준이와 함께 수진이네로 가서 함께 떡국을 먹었다. 떡국을 먹고 난 후 부모님께 영상통화를 드렸다. 음력설에는 찾아뵙겠다고. 그리고 시어머니께도 전화드렸다. 떡국은 드셨는지,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건강에 이상은 없으신지 하고 말이다. 서준이를 수진이네 맡겨두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에 시간만 나면 환한이가 짓는 건축물 생각이었다. 마침 그때 전화가 왔다.


“백수! 백수! 백수민! 한 살 더 먹은 기분은 어때?”

“피차일반, 너랑 같은 마음이겠죠?”


“드디어 도면 컨펌받았어. 어찌나 깐깐한지. 이래서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니까."

“다행이다. 그래도 잘하면 너의 포트폴리오가 될 작품 나오겠던데?"


"그렇지? 너도 함께 해야지."

"아. 나도?"

정말 멋진 공간이 나왔으면 바람이었다.


"너도 이 건축물이 포트폴리오가 되면 좋잖아."

맞는 말이었다. 기회는 준비해 둔 자의 몫이라는 식상하고 무거운 말들을 우린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외부 공간과 조경, 실내 마감재 등은 온라인으로 내용 공유하면서 진행하기로 했어. 다음 주부터 메인 공간 뼈대 작업부터 공사 들어갈 거야.”

“와, 진행 빠르네.”


“아마 정신없이 돌아갈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가 나 좀 살려줘라. 제발.”

“알겠어. 도와줄게. 대신 톡톡히 챙겨줄 거지?"


"당연하지."


도와달라고 안 해도 이미 이번 프로젝트의 팀원이자 조경팀장이 되어있었다.


“오래간만에 몸 좀 풀어볼까?”

“그래서 말인데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하기 전에 사전 자료조사부터 해야잖아."


"그래서?"

"출장 다녀와야지."


"출장?"

"이틀 후야.”


“어딘데?”

제주 아일랜드입니다. 티켓팅, 숙소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뭐? 너 진짜!”

“미안, 상의 없이 마음대로 해서.”


“꼭 제주도까지 가야 해?”

“의뢰인이 꼭 가보라는 곳이 있어서. '갑'이 시키면 해야 하잖아. 우린 '을'이니까.”


갑의 권유는 명령이었다.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찜찜하게 수락했다. 우리 둘은 제주도 출장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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