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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옹이 Feb 28. 2024

벗어나고 싶은 것은 생존이 아니라 고뇌이다

Arthur Schopenhauer 02

자살하는 사람이 삶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은 생명 자체의 부정이 아니라 삶의 조건에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살려는 의지 자체를 단절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가 삶을 포기하려는 것은 삶을 더 이상 자기 뜻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생존 자체가 아니라 바로 고뇌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들의 의지가 자발적으로 생존을 포기하려면, 이미 그 이전에 우리는 커다란 고뇌에 의해 절망적인 좌절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까지 몸부림치며 버티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절망의 절벽에 섰을 때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그제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런 고뇌의 과정을 거쳐서야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높은 영혼의 정신적 경지에 이를 수가 있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만이 우리가 말하는 해탈, 즉 살려는 의지의 포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죄인도 큰 고뇌 속에서 정화되어야만 세사람으로 거듭난다. 그런 예는 세상에 많다. 그 경지가 되어야 그에게는 죄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는 하루 속히 죽어서 그 죄를 보상하려고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라는 이 세상의 피상적 존재가 이미 자신과는 무관한 존재가 되어 그것이 죄와 함께 한꺼번에 소멸되기를 원하게 된다. 


독일의 작가 괴태는 파우스트라는 작품에서 그레첸의 입을 빌려 인간의 의지가 큰 불행과 절망을 통해 자기 포기에 이르는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 과정은 매우 훌륭하게 그려져 있다.

여기서 그레첸은 자신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고뇌를 잘 깨닫고, 자기 자신도 일체의 중생처럼 그 고뇌를 함께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탈에 이르는 간접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매우 공감하는 문장들.

요즘 사람들이 절망하는 것도, 밥을 굶고 사는 걱정이 아니라, 평생 자기가 원하는 삶의 조건에 부합하는 삶을 실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함이다.


오늘날 버전으로 통역하면 

마용성 자가 브랜드 국평 아파트, 여유로운 현금흐름이 있는 부자가 되는 꿈 같은.

남부끄럽지 않은 공익광고 같은 곳에 나오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꿈 같은.

화려한 플렉스와 행복한 세계여행 같은.


그런 것만 쫓지 않는다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질 것이다.




그대는 세상을 잃는다 해도 한탄하지 말라

이 세상은 허무의 허무이므로

그대 만일 세상을 손아귀에 넣어도 기뻐하지 말지어다

이 세상은 허무의 허무이므로.

괴로움도 기쁨도 한낱 이슬처럼 잠시뿐이니

이 세상에서 얻음과 잃음과 선악도 허무의 허무요

없음의 없음이거니.


플라톤이 말한대로 

우리들의 삶에서 열광할 만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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