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기 딱 좋은 나이

20대의 기쁨과 슬픔을 건너가려면

by 강하라

27살이 된 나에겐 은밀한 취미가 있다. 그건 바로 과일 훔쳐 먹기. 김치찌개에서 고기를 골라 먹는 것 정도는 귀여운 정도에 속한다. 김치찌개는 가스레인지 위에 그대로 있고, 뚜껑만 슬쩍 열면 끝나니까. 그에 반해 과일을 몰래 먹는 일은? 굉장히 복잡한 메커니즘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괴도 일지-

오늘의 도둑질 목록. 딸기 3알.


1. 살금살금 거실에 나와 냉장고를 연다.

2. 딸기 상자 포착!

3. 상태 좋은 딸기 몇 개를 골라 왼손으로 쥔다.

4. 먹은 티가 나지 않게 남은 딸기들을 쓱쓱 흩트려 놓는다.

5. 싱크대 물을 콸콸 튼 뒤 이 폭포 같은 소음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기를 빈다.

6.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고 이파리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민한다.

7. … (딸기 입냄새로는 들키지 않겠지?)


그냥 먹는 것보다 훔쳐 먹는 것이 더 맛있다. 미량의 배덕감. 구질구질함. 킥킥 흘러나오는 즐거움. 이렇게 27살을 죽지 않고 견딘다는 건 참으로 깜찍하고, 또 끔찍한 일이다. 아무리 맛있는 딸기도 이미 다 아는 맛이고, 들켰을 때의 후폭풍도 뻔하디뻔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등짝 정도 맞겠지…


이제 나는 뭐가 될 수 있을까. 대도가 되기는커녕 집 안에서조차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과일 괴도. 요절할 천재가 되기에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고 비운한 인생을 미치도록 비관하지도 않기 때문에 27세 클럽은 나를 끼워주지 않을 것이다. 감정이 피곤하고, 세상을 사랑하진 않지만. 그래… 유재하처럼 사후에 굉장한 인기라도 얻으면 그게 더 큰 일인 거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없는 미래를 생각하니 어쩐지 배가 아플 것 같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내일 뭐 하지’ 생각한다.


팔리지 않을 노래를 만들고, 픽스되지 않을 가사를 쓴다. 이것도 문젠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케이팝 음악을 한다고 하면 다들 언젠가 큰 한 방이 터질 거라고, 그러니까 좀 더 기다려보라고, 네 인생은 한방에 필 거라고 하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한방, 두방, 세방 터지더라도 밤하늘의 불꽃놀이조차 안 되는 그런 일. 공부할수록 가난해지고 파고들수록 더 허름해질 그런 일. 쓰면 쓸수록 모르겠고 어지러워서 인생의 역작이 ‘가난한 사랑 노래’의 아류작뿐일 일


검은 입. 검은 잎.

같은 일.


어떤 세계의 글은 100가지 문법만 외우면 100억은 금방 벌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아는 세계의 글은 하늘과 구름과 햇빛.

떨림과 순간, 아득함, 몽환, 환상, 꿈. 처음, 끝까지, 더 높이, 믿고, 맡기는 것들.

그러니까 찾거나 날거나 별빛 속에서 유영하거나 무언가 아름답고 찬란한 것들이 답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답을 알고도 답만 피해서 OMR카드를 찍고 싶은 것이다. 집에 와서는 오답 노트만 줄곧 쓰고 싶은 것이다. 답을 맞히기 위해서, 답을 피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답하기 위해서. 답습이 아니라. 아아, 삐뚤어지고 싶다. 그 말은 ‘돈 벌기 싫다.’ ‘앞으로도 이렇게 쭉 누군가에게 기대서 살고 싶다.’ ‘자립하고 싶지 않다.’와 동의어가 되는 곳에서.


시험에서 1등을 하면 기껏해야 문상을 받겠지. 계속 1등을 한다면 더 많은 돈을 받고, 명품을 입고 바르고, 조금 더 운이 좋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을 다 만나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살겠지. 하고 싶은 일… 심장 뛰는 일. 설레는 일. 말만 들어도 멋진 일. 기분 째지는 일. 모두가 부러워하는 일. 그런 일이 다 떨어지면? 설렘도 행복도 기쁨도 머잖아 다 무뎌지면?


“그 사람 만나봤는데 별거 없더라.”

“그거 해봤는데 별거 아니더라.”


반짝반짝 작은 별이 마트에서 파는 무드등 따위가 된 27살.

사람들이 결혼 임신 출산을 하는 이유는 상대를 너무 사랑해서가 아니라 오금 저리게 짜릿한 이벤트가 없어져서가 아닐지 생각하는 27살.


그러니까 27살은 다시 태어나고 싶은 나이. 환생이든 회귀든 왜 이렇게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는 것’에 열광하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은 나이. 지구는 그래봤자 보잘것없지만 더 보잘것없는 것에도 눈을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 학기 때 친구를 사귀지 못해 펑펑 울고, 끈적한 새콤달콤 복숭아 맛이 주머니에서 녹아가던 시절이. 곡 하나만 발매되면 소원이 없겠다! 너무 간절해서 남몰래 훌쩍이던 시절이. 그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그땐 사소한 것에도 과도하게 슬펐고, 기뻤고, 아팠다. 특히나 안쓰러운 건 그 감정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 미숙했던 것. 일기를 쓴대도 아는 단어는 한정되어 있었고, 딱 그만큼만 기록했다. 그 단어만큼만 겪었고 배웠다. 이제야 알게 된 절망이 있다. 시간이 흘러야 하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고, 삶의 요령을 배운 만큼 삶에 무뎌졌다. 새로운 감각은 이제 없다. 가진 거라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렇게 손꼽아도 다섯 개뿐. 먹을 수 있는 건 이미 다 먹어봤을 것이고, 맡지 못한 향 중에 가장 센 건 시체 썩는 냄새 정도일 것이다. 과학 기술이 아주 많이 발전해서 VR이 실제처럼 느껴지더라도 그곳에서 갈 수 있는 곳은 지구 어딘가에 분명히 있는 곳일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뻔하니까. 기상천외한 AV나 양산하지 않으면 다행일 일이다. 인간의 육감이 더 발달한다면? 누가 쎄한지 언제 손절해야 할지 조금 더 빨리 알게 되겠지. 이제 나는 다 알 것 같다. 어떻게 세상이 흘러왔는지, 어떻게 흘러갈 건지. 기껏 조금 앞으로 가도 그보다 더 뒷걸음질 칠 테고, 세상은 거기서 거기. 거기로 흘러갈 것이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그렇게 믿고 싶다. 눈을 감으면 뻔한 세상. 이 편한 세상.


글을 써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밤 11시 반에 퇴근한다는 친구의 문자에서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엄마는 왜 전화 통화를 서너 시간씩 하는지. 왜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지. 더 나아간다면 가부장제의 대물림에 대해. 지구 반대편의 슬픔과 사랑에 대해. 가난에 대한 납작한 시선에 대해. 자연을 소유하기로 한 첫 번째 사람에 대해. 그러니까 나는 왜 사는가…에 대해.


그래도 나는 꾸준히 궁금해할 테지.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보단 소나기에도 물이 새는 어떤 집을, 즐거운 나의 집에서 들리는 삐걱대는 소음을,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다시 집을 짓는 비버들을.


최대한의 슬픔이란 건 사랑하는 연인이 이별을 고했거나 내가 그를 잊지 못했을 때, 딱 그 정도여야 하는데 나는 더욱 거대한 슬픔을 원하고 있다. 바보 같은 일이다. 슬픔이여 밀려오라... 내 수준으론 감당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껴안고 싶어 한다. 충분히 괴로운 어느 삶에서 더욱 괴로운 삶들을 껴입고 싶어 한다. 슬픔의 폭을 늘리고 그곳에 다른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건 아주 가끔이고, 내가 사는 이유가 될 순 없다. 그러니까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꺼이꺼이 넘어가게 슬픈 사연을 봐도, 청춘을 바쳐 어느 한 부조리를 위해 고군분투한대도. 언젠가는 진짜 ‘어른’이 될 것이다. 이렇게 철없는 20대에서 벗어나서.


나는 이깟 명제에 우울해진다. 그럴 땐 딸기, 딸기가 해답이다. 딸기를 실컷 먹으려면 돈이 필요하지. 그럼 내 인생으로 돌아가야 할 테고, 그럼 ‘남의 인생 따위 알 게 뭐야,’ 그런 마음이 되지. 나를 겪는 것과 남을 겪는 것의 중간지점에서 새벽이 온다. 잠에 들 시간이다. 오늘은 악몽일 수도 있지만 예지몽일 수도 있다. 너의 기쁜 일이 예지몽이기를, 나의 슬픈 일에 ‘꿈은 반대다’라는 말이 들어맞기를. 딱 이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오늘치의 인류애로는.


나는 매일 매일 다시 태어날 것이다. 어떻게 태어날지는 나도 모른다. 어제 어떤 꿈을 꿨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걸까? 그것도 모른다. 그냥. 27살은 다시 태어나기 딱 좋은 나이니까. 아주 이기적인 내가 될 수도 있고, 너무 이타적이라 다 주고 껍데기만 남은 내가 될 수도 있지. 아기처럼 말랑말랑한 두뇌로 나뭇잎의 모양을 신기해하며 하루 종일 따라 그릴 수도 있고, 빨간색과 파란색 사이에서 어느 한 색만이 옳다고 소리칠 수도 있다.


FACT 검사와 DISC 검사와 나의 강점 찾기 검사와 사주와 손금과 점성술 차크라 보고서를 읽고 나를 찾는 일도 조만간 관둘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 세상이 어떤 모양인지 아는 것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그게 중요한 거겠지. 수많은 이솝우화의 플롯이 결국엔 명언 엔딩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이렇게 각잡고 쓰는 글의 끝은 늘 성찰로 가닿는다. 대놓고 <교훈>을 주는 글은 참 재미없고 짜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왜 써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된다. 오늘은 그걸로 됐다.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아이니까. 성장의 여지가 있다.


내일은 쉽고 못된 사람보다 힘껏 어렵고 그럼에도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려고 한다. 쉽고 못된 것들을 재미없어 하려고. 힘껏 어렵고 머리 아프고 복잡하고 그럼에도 선한 것들을 좋아하려고.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는 세상에서 한참을 빙빙 돌아가서 나는 인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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