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글쓰기

오래 묵혀둘 수록 더 깊은 맛이 나는 게 글이라서

by 강하라



내 글은 발효식품이다. 이거다! 싶은 글감이 생겨도 안에서 몇 년은 푹푹 익히고 숙성시켜야 그럴듯한 음식이 된다. 프랑스산 와인도 아니고 어떤 애는 15년산, 어떤 애는 20년산. 오래 묵히면 묵힐수록 풍미가 깊어지고, 산도 밸런스가 적절하게 맞춰진다. 너무 시지도, 달지도, 쓰지도 않은, 다음 날 숙취 없는 글쓰기란 장인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내 게으름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얼마 전에는 약 10년 정도 숙성시킨 ‘오컬트’라는 글감을 요리해 보려고 했다. 저 멀리서 보기에도 무언가 빼꼼 솟아있길래 머리채를 살짝 들어 올렸는데, 역시나 허탕이었다. 나는 오컬트를 다루기에 그다지 오타쿠가 아니어서 조금 더 깊은 오타쿠가 될 때 다시 도전해 보기로 한다. 안타깝지만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다. 착각은 금물. 마감날이 다가올수록 미친 듯한 빠르기로 손이 움직이고, 입이 터지고, 근질근질해서 미치겠더라도 어떤 주제는 완벽히 숙성되기 전까진 건드리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까딱하다간 영영 이별이다. 다시는 ‘오컬트’라는 주제를 입에 올리지도 않겠습니다. 몇번을 고개 숙여 사죄해야 풀려날 저주를 받을 것이다. 글쓰기는 너무 어려워. 그냥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나에게 거는 기대가 크면 클수록, 내가 품은 주제가 넓으면 넓을수록, 거대한 동상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점점 더 작아지고 만다.


어제는 보르헤스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바탕으로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배제한 시간성>에 대한 비평문을 작성했다. 이러면 조금 있어 보이지만 나는 보르헤스라는 사람을 생전 처음 들어봤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라는 소설은 김승일 시인 ‘나의 자랑 이랑’이라는 시에서 얼핏 들어본 것을 바탕으로 나도 한 천재 하니까 천재 끼리는 통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선택하게 됐다. 천재 호소인으로서 내심 푸네스같은 인생을 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되면,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게 된다. 많이 가지지 못한 것이 참 다행이었다. 재능 없는 게 재능이 될 수가 있다니. 푸네스에 관한 글은 본문에 첨부하도록 하겠다. 그러니까, 이 글은 개인적인 글쓰기 방황일지임에 동시에 나의 글 세계를 비평하는 비평문이다. 마감에 늦은 것을 오래도록 반성하는 의미에서 누구든 마음껏 비평해 줘도 좋다. 비평문을 비평하고, 그 비평가를 비평하고, 이 모든 비평을 미술관에 올린다면 그것이 바로 현대 미술이 될 것이다. 나는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어떤 지면에도 오르지 못한다면 나만의 ZINE을 만드는 기막힌 뻔뻔함을 지니고 있으니까. 문학계의 앤디워홀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다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슬프지만 나도 푸네스와 같은 천재가 맞는지, 이 빌어먹을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책을 한 줄 읽기가 무섭게 10줄의 생각이 떠오른다. 눈앞의 활자가 너무 버겁고, 벅차게 느껴져서 숨을 훅 참기도 한다. 책장을 덮고 주체할 수 없는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휴대폰을 열면 이 벅찬 희열도 금세 한낮의 꿈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다시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슬롯머신처럼 설계된 극악무도한 SNS 플랫폼 속에 몸을 맡기고 유영하듯 둥둥 떠다닌다. 역시나 이 편이 정신 건강에는 좋다. 언젠가 내가 말하고자하는 정확히 그 말을 누군가가 대신 해줄 것이다. 나는 RT와 좋아요로 내 의견을 대신할 것이다. 어쨌든 세상은 바뀔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그게 퍽 슬프다.


나는 슬픔에 관한 면역이 있다. 아무렇지 않지 않았던 날들도 아무렇지 않게 승화하는 데 재주가 있다. 친구가 자신의 불행에 대해 슬며시 꺼내 놓을 때, 소주잔 앞에서 눈물을 터트릴 때, 나는 그제서야 오래도록 묵혀둔 나의 슬픔에 대해 꺼내 둘 것이다. 거봐, 나도 살아있잖아. 그게 웃기지 않아? 하고. 나는 같이 눈물 흘리기에 적합한 사람은 아니다. 대신 정신승리에는 꽤 일가견이 있다. ‘너는 분명히 행복해질 거야.’ ‘너의 불행은 더 큰 그림에서 행운으로 뒤바뀜 될 거야.’ 신의 마음은 눈곱만치도 모르면서 신의 대리인 행세를 한다. 그러니까 그건 사실일 거야. 언젠가 죽어서 물어볼 수 있게된다면, 답을 듣게 된다면, 내 말이 증명될 테니까. 그러니까 그는 우리를 사랑하는 게 맞을 테니까. 아니더라도 맞다고 해야지 어쩌겠어?


쓰다가 보면 깨닫게 되는 게 있다. 글은 마음을 한 치 앞서가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 오늘, 사랑에 관해서 쓰고 싶구나? 뒤늦게 자각하게 된다. 오늘 만난 사랑스러운 사람들에 관해서. 스쳐 지나갈 수도 있지만, 이런 기쁨은 쉬이 오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자각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어렵다. 특별하지도 않은 오늘이지만, “그냥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로 시작하는 글. 어찌나 순수한지 칭찬 한 번에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커피숍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음료며 케이크며 다 가져다주고 싶다던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나를 위해 커스터드 푸딩 8개를 구워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 오면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흔드는 누군가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오늘 만난 다정한 사람들 안에는 사랑이 깃들어있다. 닳고 닳은 사랑이지만, 아무튼 사랑. 사람. 내가 사랑하는 건 그 둘 사이를 연결 짓는 마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