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다
일본으로 향했다.
빵집에서 단련된 멘탈이라면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함께였다.
목적지는 규슈의 작은 시골 마을, 사가현.
친구의 먼 친척이 홈스테이 자리를 내어준다는 말에 냉큼 비행기에 올랐다.
친구와의 여름 방학 여행 중, 일주일 여행으로 뵌 적 있는 이모였다.
그리고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 인자한 미소 뒤에 숨겨진 계획을.
이모는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자, 동네의 유일한 한국식 야키니꾸 사장님이었다.
남편만 믿고 온 이모였기에 첫 시작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근처 골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아르바이트를 가기 위해 쌌던 도시락 속 김치가 입소문을 탄 것이 기회였다.
이모는 기세를 몰어 어느새 가게를 차리고 건물을 두 채나 사들이게 되었다.
여기에 동방신기라는 한류 붐과 한국인 감독님이 임명된 후, 1부 리그로 승격한 동네 축구팀이라는 행운까지 더해져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그야말로 최전성기였다.
"홈스테이 비용은 안 내도 돼."
이모는 대장부처럼 말했다.
대신 월급은 없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를, 나는 하루 10시간의 노동으로 깨달았다.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 하던 스물 두 살의 나는, 나의 가치를 그 정도로 생각했다.
어쨌든 집 없는 설움은 피해야 했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일본 생활을 시작하였다.
밥은 주면 먹고, 안 주면 손님이 남긴 요리나 손질 후 님은 고기를 구워 먹었다.
이 자리를 빌려 당시 축구 선수분들께 감사를 전한다.
나의 짠내 나는 생활을 눈치챈 그분들은 일부러 고기를 남기고, "팁!"이라며 지폐를 쥐여 주셨다.
동갑내기 선수들의 삶과 내 처지를 비교하며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그저 감사히 받아 유용하게 썼다.
생존이 먼저였다.
나의 첫 임무는 홀서빙.
이모는 내게 세 문장을 전수했다.
이랏샤이마세! (어서 오세요)
카이테 구다사이. (써주세요)
아리가토고자이마스! (감사합니다)
놀랍게도 가게는 이 세 마디로 완벽하게 돌아갔다.
이모와 나, 그리고 베트남 청년 셋이서 하루 200만 원, 많게는 500만 원의 매출을 올렸으니 얼마나 정신없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요령이 있을리 없었다.
모르는만큼 더 움직였고 더 열심히 했다.
이십대의 체력에도 지치는 일이었다.
일이 끝나면 샤워도 못한 채 그대로 기절했다.
빵 포장으로 단련된 손목도, 고기 불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한 달쯤 지나자 현타가 왔다.
'이건 아니다.'
내 수중의 돈은 200만 원.
여기서 탈출하려면 언어가 필요했다.
근처 어학당의 한 달 수강료는 40만 원.
그 당시 나는 휴대폰도 없었다.
정확히는 한국에서 가져온 휴대폰이 있었지만 통신사를 계약할 능력도 돈도 없었다.
휴대폰도 없이 와이파이존을 전전하고, 이모가 물려준 폐차 직전의 차에 기름을 넣는 게 유일한 사치였던 내게는 여유가 있을리 있었다.
그래도 혼자가서 어학당을 등록하였다.
단 세 달만이라도 다니고 싶었다.
이대로 '이랏샤이마세' 봇으로만은 살 순 없었으니.
그렇게 오전엔 학생, 오후엔 노예.
다시 투잡 라이프가 시작됐다.
힘들었지만 일본어가 늘었고, 노력한 만큼 반에서는 늘 1등을 했다.
밥 한 번 해본 적 없는 내가 웬만한 한식은 눈 감고 만들게 된 건 덤이다.
강제 노동으로 끌려나갔던 지역 행사에서 만난 일본인 분들과는 '강제 노동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연락한다.
심지어 내 결혼식에도 와주셨다.
역시 고생은 같이 해야 제맛이다.
물론 매일 밤은 울면서 잠들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니, 웃기는 에피소드도 꽤 많다.
특히 나는 이 시기, 경찰과 총 세 번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경찰과의 세 번의 조우
1. 첫 조우: 일본 땅을 밟은 첫날
일본 운전석은 오른쪽에 있다.
시골이라 하루에 버스는 세 대 뿐이었고 이모는 폐차하기 직전의 차를 선물로 주셨다.
덕분에 장롱에 고이 모셔놨던 운전 면허는 국제면허가 되어 데뷔하지만 나는 차를 받자마자 자신만만하게 역주행을 감행했다.
하필 맞은편에 파출소가 있었다.
경찰분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아, 인생은 실전이구나, 깨달았다.
나는 일본어를 못했고, 가진 건 국제면허증뿐.
휴대폰도 없었다.
그저 "스미마셍, 스미마셍!"만 외쳤다.
다행히 경찰관은 친절한 분이었다.
그는 번역기를 돌려 내게 문장 하나를 보여주었다.
[내가 너의 첫 일본인 친구가 될게.]
경고로 끝난 강렬한 첫 만남 덕분에, 나는 이후 완전한 우측통행 운전자가 되었다.
2. 두 번째 조우: 수상한 사람
그날도 전쟁 같은 하루였다.
이모의 고함에 귀는 멍멍했고, 술 취한 손님을 대리운전해주는 수모까지 겪었다.
퇴근 후 차에 타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펑펑 울고 있는데, 누가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수상한 사람이 차에서 울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단다.
서러워 죽겠는데 이젠 수상하기까지 하단다.
해명을 위해 신분증을 찾으려 가방을 뒤집는 순간, 지갑 대신 생리대가 우수수 쏟아졌다.
나이 지긋한 경찰관 두 분이 당황하며 생리대를 허겁지겁 줍는 모습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날 이후, 수상한 사람이 되어 자전거로 출퇴근을 시작하였다.
나름 감동적인 후일담도 있다.
밤늦게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내 뒤에서 누군가 환하게 불을 비춰줬는데, 돌아보니 그 때 그 경찰관이었다. 그는 내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말없이 길을 밝혀주었다.
가끔 마주칠 때마다 반복된 그 작은 친절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다.
3. 세 번째 조우: 도둑과 축구선수
시골 마을에 연쇄 도둑 사건이 터졌다.
이모의 가게도 피할 수 없었다.
하필 이모가 한국에 간 날, 나와 베트남 친구 둘만 있던 점심시간에 일이 터졌다.
뒷문 창문이 깨져 있었고, 금고는 텅 비어 있었다.
이모의 불호령에 경찰에 불렀지만, 내 일본어 실력은 여전히 "도... 도둑...!" 수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20여 곳의 피해 가게 중 유일하게 CCTV가 있던 우리 가게였지만 그게 한국 제품이라 아무도 작동법을 몰랐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단골이었던 한국인 축구선수들이 점심을 먹으러 온 것이다.
그들은 능숙하게 통역을 해주었고, 경찰은 무사히 녹화 영상을 확보했다.
(그리고 선수들의 사인을 받아왔다.)
이 영상 덕분에 범인은 곧 검거됐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형사 한 분이 나를 이성으로 마음에 들어 하셨다.
말이 안 통하는 내가 손짓 발짓 하는 게 재미있으셨단다.
물론, 정중히 거절했지만.
역시 사람 인연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은 약이다.
지옥 같았던 그 시절도 나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안줏거리가 되었다.
가끔 이모를 만나면 고생 값을 내놓으라며 비싼 밥을 얻어먹는다.
돌이켜보면 이모 덕분에 야키니쿠를 탈출하려 더 악착같이 일본어를 공부했으니, 감사한 마음도 아주 조금은 있다.
어학당 3개월 과정이 끝나갈 무렵, 나는 확신했다. 더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월급 없는 야키니쿠를 지키며, 새로운 돈벌이를 찾아 편의점 문을 두드리게 된다.
'알바머신'의 세 번째 스테이지가 곧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