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머신, 대기업에 입성하다
4학년 1학기가 끝나고, 대학 생활의 마지막 방학이 찾아왔다.
시식용 이쑤시개를 내려놓은 내 손에 새로운 아르바이트가 찾아온다.
친한 선배가 건넨 그것은, 누구나 아는 바로 그 웹 포털 사이트 회사의 두 달짜리 아르바이트였다.
운 좋게도 그 행운의 주인공이 내가 되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음성 데이터 수집.
드라마나 CF 속 대사를 문장 단위로 쪼개 듣고 받아쓰는 일이었다.
평소 드라마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나에게 이보다 완벽한 꿀알바는 없어 보였다.
딱 한 가지, 전철로 왕복 네 시간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하면 말이다.
하지만 고등학생 시절, 왕복 다섯 시간 통학으로 단련된 프로 통학러에게 그 정도는 애교였다.
할래요! 나는 망설임 없이 외쳤다.
그렇게 아침 6시 30분에 집을 나서 밤 10시에 돌아오는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마트 시식대가 왁자지껄한 정글이었다면, 이곳은 고요한 외계 행성이었다.
건물부터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크기였다.
고속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신기해하던 그 건물에 내가 들어간다.
사원증을 목에 건 내 모습이 스스로도 제법 멋져 보였다.
첫 출근 날, 직원 분이 내려오셔서 사원증을 태그하자 유리문이 스르륵 열렸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스쳤고,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오갔다.
판촉을 위한 외침과 카트 끄는 소리 대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만이 가득한 공간. 그동안 내가 일했던 일터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헤드셋을 끼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오직 쪼개진 음성의 세계로 들어갔다.
어떤 날은 "사랑해, 미치도록 사랑해" 같은 애절한 고백만 받아쓰고, 어떤 날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처절한 절규만 수백 번을 들었다. 앞뒤 맥락 없이 던져지는 단어의 파편들을 타이핑하다 보면, 마치 세상의 모든 회로를 조립하는 부품 공장의 직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무실에는 나 같은 한국어 담당 외에 미국 유학생이라는 신인류도 많았다.
대부분 국제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명문대에 재학 중인 방학을 맞아 잠시 한국에 온 친구들이었다.
나와 나이는 비슷했지만, 확실히 다른 세상의 공기를 마시고 자라 다른 공기를 내뿜었다.
하지만 낯섦도 잠시, 우리는 퇴근 후 분당의 한 순댓국집에서 한민족이 되었다.
뚝배기에 담긴 순댓국을 보며 "나 이거 처음 먹어봐!"라며 신기해하는 친구에게, 나는 자신 있게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같이 일하는 한국어팀 동료가 소주병 목을 잡아 격렬한 손목 스냅으로 회오리를 만들자, 친구들은 눈을 반짝였다.
순대 한 점에 소주 한 잔.
우리는 서로를 아재 입맛이라 놀리면서 어느새 뜨끈한 국물과 소주로 대동단결했다.
그들은 내게 영어 공부 비법부터 미국 대학의 파티 문화, 그들만 아는 희한한 춤사위까지 신세계를 알려주었다.
우리 한국어 팀은 <쇼미더머니>에서 연마한 힙합을 전수했고, 다 함께 노래방으로 향했다.
안주와 술을 방 안에서 주문하는 '준코' 시스템에 그들은 거의 K-문화 충격에 가까운 열광을 보냈다.
그곳에서 우리의 K-힙합과 그들의 미국 춤사위가 뒤섞인, 국적 불명의 아름다운 콜라보가 펼쳐졌다.
어느새 우리는 애국가를 열창하며 밤을 새우고, 주말에도 만나는 끈끈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꿈같은 일은 회사 안에서도 계속됐다.
라디오 스튜디오 앞을 지나는 유명 아이돌과 눈을 마주치고, 휴게실에서는 평소 즐겨보던 웹툰 작가와 마주쳐 같이 인증샷을 찍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그 모든 판타지의 정점은, 단연 무료 자판기였다. 자판기 안에는 김밥, 샌드위치, 바나나우유, 요구르트 등 편의점 하나가 통째로 들어 있었는데, 이 모든 게 공짜였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 도장을 찍자마자 자판기로 달려가 오늘의 김밥과 우유를 깨 먹었다.
매일 바뀌는 메뉴 덕분에, 왕복 네 시간의 출퇴근길이 조금도 지겹지 않았다.
푹신한 소파가 있는 휴게실, 한식·중식·양식·분식 중 골라 먹는 구내식당.
'아, 대기업에 다니면 이런 복지를 누리는구나.'
같은 신입이지만 다른 메뉴들에 난생처음 '대기업 취직'이라는 뜬구름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마지막 출근 날,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천천히 사원증을 태그했다.
마지막 공짜 김밥을 유난히 아껴 먹고, 친구들과 SNS 아이디를 교환하며 "한국 오면 무조건 연락해!"라며 아쉬운 인사를 나눴다.
회사를 나서며 거대한 유리 건물을 돌아보았다.
딱 두 달간 나에게만 허락되었던 세계.
다시 덜컹거리는 전철에 몸을 싣자, 화려했던 판타지는 꿈처럼 멀어지고 현실의 공기가 나를 감쌌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내 손에는 여전히 졸업 작품이 들려 있었지만, 이제 그 너머로 분당의 화려한 오피스 빌딩과 반짝이던 친구들의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했던 공짜 김밥의 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조금 더 커져 버린 꿈을 안고 졸업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