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지킨 동네 슈퍼마켓
4학년 1학기가 끝나자, 학생 신분의 유통기한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졸업이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 당최 글이 써지지 않았다.
나의 과는 졸업 시험 대신 새내기 작품을 출판해야 했는데, 시나리오 속 등장인물들은 어째 하나같이 내 주변 친구들을 빼닮아 있었다.
나는 새로운 사람이, 진짜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나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조용한 야간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다.
편의점을 기웃거리던 내 눈에 노랗게 변색된 구인 광고 하나가 들어왔다.
빽빽한 아파트 상가에서 10년간 한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동네 슈퍼마켓.
24시간 운영이었지만 밤 10시만 넘으면 온 동네가 잠드는 그곳은 내게 완벽한 작업실이 되어줄 것 같았다.
"취업될 때까지 일하고 싶습니다."
나의 당찬 포부에 사장님은 다음날부터 바로 나오라며 흔쾌히 허락하셨다.
계약서도 없이 그저 신뢰로만 계약이 맺어졌다.
일은 단순했다.
물건 채우기, 계산하기, 손님 없을 땐 청소하기.
복잡한 행사 상품 포장, 작업 일, 과일 등을 덤으로 파는 일도 없었다.
술만 들어가면 기분이 과하게 좋아지는 점만 빼면, 평소엔 세상 조용하고 친절한 사장님 마음에 쏙 들었다.
덕분에 소소한 이벤트는 있었다.
사장님은 술에 취해 친구분을 데랴와 "마음껏 골라!"를 외쳤고 다음날 아침 CCTV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의 쓸쓸한 뒤통수는 나름 정기 공연 같은 것이었다.
복지는 휴대폰 충전 무료와 5,000원 식대였다.
슈퍼 안에서 5,000원어치 물건을 고른 뒤 영수증만 남기면 끝.
나는 이내 5,000원 맞추기에 빠져들었다.
과자 하나, 음료수 하나, 아이스크림 하나를 조합해 4,980원, 5,010원을 넘나드는 희열!
덕분에 나는 2,000원 미만의 상품은 바코드 없이도 가격을 맞히는 기묘한 능력을 얻었다.
큰 일도 있었다.
내가 일하던 시절, 담뱃값이 4,500원으로 오르는 ‘담배 대란'이 터졌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손님들의 사재기 전쟁 속에서, 나는 나름의 '고객 관계 관리 (CRM)' 시스템을 도입했다.
담배 한 갑에도 인연은 싹튼다는 걸 그때 배웠다.
계산대 뒤는 나만의 관찰 실험실이자 비밀 작업실이었다.
물건을 고르고 계산하는 그 짧은 순간, 사람들은 저마다의 드라마를 품고 있었다.
과자 하나를 두고 벌이는 아이와 부모의 치열한 힘겨루기.
쭈글쭈글한 동전을 펼쳐가며 과자 값을 세던 초등학생의 진지한 눈빛.
갓 받은 민증을 내밀며 술과 담배를 사고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던 스무 살의 얼굴.
퇴근길에 들러 늘 내 몫까지 간식을 챙겨주시던 아주머니의 따뜻함.
가게에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깎아 줘!"를 외치던 할머니의 우렁찬 목소리까지.
그 모든 풍경이 내 졸업 작품의 소중한 재료가 되었다. 나는 그들을 관찰하며 글을 썼고, 무사히 졸업 작품을 통과했다.
참고로 당시 내 시나리오의 장르는 싱크홀을 재료로 한 재난물이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글 속에서 나를 괴롭혔던 몇몇 손님들은 모두 사이좋게 싱크홀로 빠져줬다.
내 작은 복수이자, 창작자의 특권이었다.
마침내 졸업.
나는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토록 편하고 인간적인 아르바이트를 떠나기엔 너무 아쉬웠다.
나는 마침 식당 일이 고되다던 엄마에게 이 꿀알바를 조심스레 제안했다.
놀랍게도 엄마는 대만족하셨다.
포스기 앞에서 버벅대는 엄마를 위한 나의 1:1 특훈이 시작됐다.
처음엔 힘들어하셨지만, 엄마는 금세 적응하셨다.
특히 전날의 술주정을 기억 못 하는 사장님을 보며 허를 찔러 콧방귀를 뀌시며, 그 모습이 꽤나 통쾌하신 모양이었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그 슈퍼마켓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마지막 날까지 계산대를 함께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