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머신 재개장, 주유소

이번 종목은 불스원샷입니다

by chacha

그 겨울이 끝나고 시작된 첫 사회생활은, 생각보다 고되고 아팠다.


무사히 졸업 여행을 마치고 사회로 내던져졌다.

'알바머신'의 시대는 끝나는 것 같았다.

이제는 번듯한 직장인이 될 차례였다.

하지만 겨울이 끝나고 시작된 첫 사회생활은 내 생각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나는 기업에서 운영하는 고용디딤돌 프로 그램에 합격해 꿈에 그리던 마케터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내가 가고 싶었던 마케팅 기획 부서는 공중분해 되었고, 나는 반강제로 고향집 근처 사무실의 텔레마케터가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온종일 욕을 먹는 건 차라리 견딜 만했다.

사장님 앞에서 춤을 춰야 성과급을 주거나, 신입인 내가 그의 생일상을 차려 바쳐야 하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나를 짓눌렀다.

성추문 사고까지 보며 나는 10개월 만에 첫 사회생활에 사표를 냈다.

(이 이야기는 슬프니, 저의 다른 연재물 '엔지니어가 될 줄은 몰랐지'를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피폐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항공사 지상직'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국비지원으로 항공권 발권 수업을 들었고, 평일에는 일본어 공부에 매달렸다.

자격증을 따고, 일본어 실력을 N2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일본어 능력자는 널리고 널렸다.

나 정도의 애매한 실력으로는 면접 볼 기회조차 없었다.


운 좋게 한 군데 면접이 결정 되었다.

서울 취업 박람회에 온 기업에서 면접을 보게 된다.

종이를 보고 일본어로 열심히 읽었으나 그 문장을 그대로 영어로 이야기 하라는 말에 좌절하게 된다.

그렇게 나서는 길, 입구 앞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했다.

바로 '일본 취업 연계 프로그램'.


늘 즉흥적으로 인생의 방향을 틀었지만, 하고 싶은 건 해야 되는 나는 또 다시 일을 저질렀다.

이름을 적고 이력서를 낸 후, 기다리던 합격 연락을 받게 된다.

다행히 일본에서 만난 남자친구는 내 꿈을 응원해주었고, 나는 모든 걸 정리하고 연수원이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4개월 후, 나는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일본 회사에 내정되는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비자 발급이 하염없이 길어지면서 통장 잔고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그렇다.

'알바머신'은 잠시 휴업했을 뿐, 폐업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바로 '불스원샷' 판매 아르바이트였다.

주유소에서 엔진 때를 빼준다는 바로 그 제품.

나의 새로운 일터는 땡볕 아래 아지랑이 가 피어오르는 셀프 주유소였다.

담당자님이 차로 주유소에 내려주시면, 나는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판매용 매대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주유를 하러 온 고객에게 다가가, 주유가 끝나는 짧은 시간 안에 영업을 끝내야했다.


일단 권유 자체를 질색하는 분들도 많았기에, 눈치껏 다가가 싫은 기색을 보이면 미련 없이 물러섰다.

나름의 영업 전략도 생겼다.

너무 쌩쌩한 신차보다는 연식이 좀 있는 차주분들이 더 관심을 보이셨다.

구매가 성사되면 사용법을 설명하며 그 자리에서 직접 주입해드리고, 서비스로 기름까지 넣어드렸다.

(LPG 차량은 총으로 공기를 직접 주입해야 해서 다음 날 팔 이 뻐근했다)


결제는 주유소에서 이뤄졌다.

원래 불스원을 판매하는 주유소에서 판매 하는 것이기에 매출이 생기면 주유소 소장님님도 좋아하셨다.

성과가 좋은 날이면 어떤 주유소 소장님이 짜장면을 시켜주셨다.

기름 냄새 섞인 매캐한 공기를 반찬 삼아 주유소 구석에 쭈그려 앉아 먹던 그 짜장면.

이상하게도 그게 내 인생 최고의 짜장면이었다.


주유소의 터줏대감인 택시 기사님들은 나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셨다.

안면을 튼 기사님들은 동료 기사님들에게 이거 한 번 넣어봐, 차가 달라져!"라며 바람을 잡아주셨고, 덕분에 나는 매번 완판을 이어갔다.

퇴근길에는 "학생, 집 가는 길인데 타!"라며 툭, 하고 온정을 베풀어 주시기 도 했다.

첫 회사에서 사람에게 할퀴어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온기 속에서 조금씩 아물어갔다.


이 알바는 판매 건당 1,000원의 인센티브가 있었고, 완판하면 조기 퇴근이 가능했다.

나는 이전의 판촉 알바 경험을 살려 생각보다 잘 팔았고, 무엇보다 텔레마케터 시절 단련된 강철 멘탈 덕에 고객의 무시와 거절쯤은 가뿐히 넘길 수 있었다.


그토록 지긋지긋하고 도망치고 싶었던 첫 직장의 경험이, 주유소 한복판에서 나를 다시 쓸만한 '알바머신'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인생에 정말 쓸모 없는 경험은 없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배우고, 성장하며 일본으로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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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