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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나재나 Sep 26. 2024

백선생님 없어도 괜찮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03

요리 초보라면, 필수로 보는 것이 백종원의 유튜브일 것이다. 단언컨데 나는 백종원의 레시피 영상을 모두 다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영상 하단의 '더보기'를 다 보았다고 보면된다. 영상을 다 보아야만 알 수 있는 다른 요리 유튜버들과는 다르게 백종원의 영상은 더보기만 눌러도 모두 재료랑 만드는 방법이 상세히 나와있어서 영상을 보지 않고 따라하기 좋았다.


처음 따라해본 건 어묵과 콩나물이 들어간 마라 라면이었다. 너무 맛있었고, 남편도 좋아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종종 그 라면을 해먹었다.


그 당시에 마라라면을 끓여먹기 위해 이만원을 썼던 기억이 있다. 집에 라면도, 조미료도, 콩나물도, 어묵도 없어서 모든 재료를 다 사니 그 가격이 나온 것이다.

더보기를 누르면 나오는 재료들이 없으면 나는 요리를 하지 않았다. 주말에 어떤 요리를 해먹을지 골라놓고 대비해서 미리 장을 봤다. 

집 근처에 가까운 마트가 없었고 편의점에서 파는 재료는 한정적이었다 B마트를 애용했으나, B마트에서도 팔지 않거나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면 나는 그 요리를 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그날 준비한 메인 요리에 필요한 딱 하나 '매실액' 없어서 포기하고, 대충 라면을 끓여먹거나 배달을 시켜먹은 적도 있었다.


나는 완벽주의자인가? 과거를 거슬러본다, 10대 때 주에 한번씩 보던 영어단어 시험은 절반만 외우기 일수였고 스무살 때 과제는 다시 읽어보는 행위따위 하지 않고 그냥 교수님에게 전송했다. 

내가 상상하는 완벽주의자는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2세나 실장님 같은 존재였다. 나는 당연히 그런 존재의 반대 쯤에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내가 사랑하고 책임져야할 일이 넘쳐났다. 

내가 담당하는 프로젝트나 팀원들이 생겼고, 감당해야하는 목표가 생겼다. 매일이 야근이었다. 야근을 해서 모든 것을 다 끝냈다고 해도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내내 회사 메신저 슬랙을 들여다봤다.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있었던 것 같아서 너무 불안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내가 올린 글의 반응을 확인하고 안심하거나 더 불안해했다. 나는 왜 이렇게 잘 하지 못하지? 나라는 사람은 매실액도 없고, 파프리카 가루도 없는 메인요리 그 자체였다.


더 완벽해지고자, 병원을 갔다. 잘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집중하지 못해요. ADHD 인가요?

선생님은 몇 가지 검사를 통해 ADHD가 아닌 불안, 우울증이라고 진단했다.


스트레스 지수가 상당해요. 

저는 스트레스를 안받는데요? 일하는 게 좋아요. 하나도 안힘들어요.


열심히 했는데 누구보다 진심이었는데 억울했다.


며칠을 울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약을 먹는 것도 싫었다. 


주말에 눈을 뜨고 남편이 샌드위치를 먹자고 했다. 우울증 진단 이후 우리는 며칠 우리는 계속 배달음식을 먹었다.

남편이 샌드위치를 포장하러 간 사이에 유튜브를 틀었고, 백종원이 유쾌하게 고추장 찌개에 들어가는 요리 재료를 소개하는 장면을 멍하니 보았다.

생각해보니 더보기로 보기만 했던 재료를 소개하는 장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없어도 무관합니다잉, 백종원의 테이블에는 10가지가 넘는 재료가 있었는데 무려 7가지가 없어도 된다고 했고 그래도 메인 재료인 3가지는 꼭 있어야한다고 했다. 그나마도 새우젓갈이 없으면 액젓이면 된다고 한다.


오랜만에 영상을 보고 따라해서 밥을 해먹었다.  재료 중 몇가지 빠진 상태로 만든 고추장 찌개는 모든 게 다 들어간 찌개를 먹어본 적이 없어서 차이를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밥 한공기를 뚝딱 먹었다.



없어도 무관합니다. 네. 맞아요. 그래도 맛있어요. 

없어도 괜찮다고 나를 위해 노력해볼게요. 


그 날 주말은 냉장고 안에서 썩어가던 재료들을 싹 정리했다. 

없는 줄 알았던 재료도 있었고, 유통기한이 지난 줄도 모르고 썼던 재료도 있었다.

내일 부터 다시 완벽하진 않아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맛있게 무언가를 만들어보리라, 나를 위해 위장을 쌓아보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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